宣宗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는 仁宗昭皇帝嫡長子라 母는 誠孝恭肅明德弘仁順天啓聖昭皇后니 以己卯歲二月九日에 生上於北京이라
生時에 衆望見光氣五采騰於宮闈之上이라 太宗皇帝嗣大位할새 上甫四歲라 仁孝皇后以至南京에 間出見群臣한대 儀容儼恪하야 屹如巨人하니 群臣瞻望驚異라
稍長에 在宮中한데 孝敬日隆하고 而喜書冊이라 初出就學에 太宗皇帝命設講席於華蓋殿之東하고 令太子少師姚廣孝及翰林內閣之臣往侍講讀이라
後講讀於武英殿할새 太宗皇帝仁宗皇帝 時親臨視한대 其智識益廣하고 襟度益弘이라
永樂七年에 車駕巡狩北京할새 以上隨行한대 道途所經에 太宗皇帝親以上過田家하야 徧覽農具及其衣食하고 且諭以農民勤苦之事曰 此爲帝王者不可不知也라하고 遂作務本之訓以授上하고
具言農事之勤勞와 王業之艱難과 與凡無逸祭祀爲政睦親用人賞罰內治外戚宦寺飮食防衛理財等事하고 曰 此帝王切要之道라하다 又命儒臣集聖學心法하고 皆親製序以授한대 上服膺惟謹이라
上天資明睿하야 讀書一目數行호대 大義瞭然하고 每覽必盡卷호대 輒記不忘한대 五經治道諸史治亂興亡之要에 尤所留意하고 諸子百家言涉理道者도 咸領會之라
太宗皇帝嘗諭上曰 讀書當求大義요 不可效書生循行數墨하야 徒費精神耳라한대 上敬佩服이라 出閣未幾에 太宗皇帝問帝王心法所在한대 以精一執中對하니 太宗皇帝大悅이라
永樂八年에 太宗皇帝親征北虜할새 命上留守北京하고 以尙書夏原吉贊輔라 時諸司政務塡委하고 且師行之際에 調度輓運事煩이라 左右有言艱大者어늘 上曰 皇祖悉有成法하니 惟遵行之耳라
自是太宗皇帝巡狩北京及征胡虜에 皆從行이라 仁宗皇帝嗣位에 冊上爲皇太子하야 中外啓事를 悉歸裁處라
洪煕元年春에 南京屢奏地震한대 群臣或請命親王及重臣往守者하니
仁宗皇帝曰 非皇太子不可라 太子仁德威望足以服人心하니 人心安卽天意定矣라 況太祖皇帝陵寢奉違已久하니 朕夙夜在念이라 今皇太子往이면 庶幾如朕往也라하고 遂召上計之하니
上泣曰 固不願違離膝下나 然宗社大計所在니 不敢辭라하고 遂决行하다
旣至南京謁孝陵이어늘 仁宗皇帝不豫하야 以璽書馳召上還하니 上卽日就道하다 時南京頗傳言仁宗皇帝上賓이어늘 臣下未敢以聞하고 但言玆正戒嚴之時니 宜整兵衛而後行이라하고
或勸上從間道行한대 上曰 君父在上하야 天下歸心하니 豈有他虞리오 且予始至遽還하니 非衆所測이라 況君父召하시니 豈可稍遲리오하고 遂由驛道馳還하다
夏六月辛丑에 上至北京하야 聞仁宗皇帝上賓하고 慟哭幾絶이라 先是에 仁宗皇帝遺詔上하사 早正大位라한대 上旣至에 以是月庚戌卽皇帝位하고 詔改明年하야 爲宣德元年이라
선종宣宗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는 인종仁宗 소황제昭皇帝의 적장자嫡長子이다. 모후母后는 성효공숙명덕홍인순천계성소황후誠孝恭肅明德弘仁順天啓聖昭皇后이니, 기묘년(1399) 2월 9일에 북경北京에서 선종을 낳았다.
선종이 태어날 때 여러 사람들의 눈에
궁중宮中의
내전內殿 위로 오색 광채가 솟아오르는 광경이 보였다.
태종황제太宗皇帝가 황위를 계승할 때 선종은 겨우 4세였다.
인효황후仁孝皇后가 선종을 데리고
남경南京에 이르렀을 때 간혹 나와 신료들을 만나보았는데, 당시 선종의
의용儀容이 의젓하고 신실하여 마치
거인巨人처럼 우뚝하니 신료들이 우러러보며 놀랍고 신기하게 여겼다.
명明 선종宣宗
조금 장성해서는
궁중宮中에 있었는데,
효경孝敬이 날로 지극해지고
서책書冊을 좋아하였다. 처음
태종황제太宗皇帝가
화개전華蓋殿의 동쪽에
강석講席을 마련하라고 명하고
태자소사太子少師 및
한림翰林과
내각內閣의 신하들로 하여금 가서 모시고
강독講讀하게 하였다.
그 후 무영전武英殿에서 강독할 때 태종황제太宗皇帝와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때로 친히 임하여 살펴보았는데, 지식智識이 더욱 넓어지고 흉금과 도량이 더욱 커졌다.
영락永樂 7년(1409)
거가車駕가
북경北京을
순수巡狩할 때 선종에게
수행隨行하게 하였는데, 지나가는 길에
태종황제太宗皇帝가 친히 선종으로 하여금
전가田家를 방문하여 농기구와 농민들이 입고 먹는 것을 두루 살펴보게 하고 또 농민들이 수고롭게 고생하는 일을
유시諭示한 다음 이르기를, “이것은
제왕帝王이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고, 마침내
을 편찬하여 선종에게 주었다.
또 농사의 수고로움과 왕업王業의 어려움 및 무릇 무일無逸, 제사祭祀, 위정爲政, 목친睦親, 용인用人, 상벌賞罰, 내치內治, 외척外戚, 환시宦寺, 음식飮食, 방위防衛, 이재理財 등의 일을 갖추어 이야기한 다음 이르기를, “이것은 제왕帝王의 절실하고도 긴요한 도리이다.” 하였다. 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성학聖學의 심법心法을 채집하게 한 다음 모두 직접 서문을 지어서 하사하였는데, 선종이 그 교훈을 부지런히 가슴에 새겨 충심忠心으로 신봉信奉하였다.
선종은 천품이 총명하여 책을 읽을 때 한 번에 몇 줄을 보면서도 대의大義를 명료하게 파악하였고 매번 책을 볼 때마다 반드시 끝까지 읽으면서도 그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는데, 오경五經에 실린 치도治道와 여러 역사서에 보이는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요체에 대하여 더욱 유의하였고 제자백가諸子百家에서 도리道理에 관계되는 내용들도 모두 확연하게 이해하였다.
태종황제太宗皇帝가 일찍이 선종에게 유시하기를, “책을 읽을 때는 마땅히
대의大義를 구해야 할 것이고,
하며 한갓 정신만 허비하는
서생書生들의 행태를 본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는데, 선종은 공경히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황제가
제왕帝王의
심법心法이 있는 바를 물었는데,
으로 대답하니 태종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 곁에서 모시면서
로
시부詩賦를 지었는데, 누차 장려하고 하사품을 내리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영락永樂 8년(1410)
태종황제太宗皇帝가 친히 북쪽 오랑캐를 정벌할 때 선종에게 명하여 남아
북경北京을 지키게 하고
상서尙書 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당시 여러
관사官司에
정무政務가 산적해 있고 또
사행師行하는 즈음에 물자의 운송을 조정하는 일이 번거로웠으므로
좌우左右에서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종이 이르기를, “
황조皇祖께서 모두
성법成法을 마련해두셨으니, 오직
준행遵行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
이때부터 태종황제가 북경北京을 순수巡狩하고 오랑캐를 정벌할 때 모두 종행從行하게 하였다. 인종황제仁宗皇帝가 황위를 계승했을 때 선종을 책봉하여 황태자皇太子로 삼은 다음 중외中外에서 올리는 계사啓事를 모두 선종에게 위임하여 재량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홍희洪煕 원년元年(1425) 봄에 남경南京에서 누차 지진地震이 발생했다고 상주上奏하였는데, 신하들 가운데 혹 친왕親王 및 중신重臣에게 명하여 가서 지키게 하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인종황제仁宗皇帝가 이르기를, “황태자皇太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자는 인덕仁德과 위망威望이 사람의 마음을 감복하게 할 만하니,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면 곧 하늘의 뜻이 안정될 것이다. 더구나 태조황제太祖皇帝의 능침陵寢에 참배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각이 여기에 있다. 지금 황태자가 가면 거의 내가 가는 것이나 같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선종을 불러 계획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종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진실로 슬하를 떠나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그러나 종사宗社의 대계大計가 있는 일이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결행决行하였다.
남경南京에 도착하여
에 배알하였는데,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병이 들어 옥새를 찍은 서신으로 선종에게 급히 소명을 내려 돌아오게 하니, 선종이 그날 바로 길에 올랐다. 당시
남경南京에서 인종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신하들이 감히 그대로 보고하지 못하고 다만 “지금은 실로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시기이니, 마땅히 군사들의 호위를 정비한 뒤에 길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선종에게 권하여 샛길을 따라가게 하였는데, 선종이 이르기를, “군부君父께서 황위에 계시어 천하가 마음으로 귀의하고 있으니,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는가? 또 나는 이제 막 도착했다가 급히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군부君父께서 부르시는데 어찌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역도驛道를 거쳐 급히 돌아왔다.
여름 6월
신축일辛丑日에 선종은
북경北京에 이르러 인종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기절할 정도로
통곡慟哭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종황제가 선종에게
유조遺詔를 내려 일찍
대위大位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종은 북경에 도착한 후 이달
경술일庚戌日에
황제皇帝에 즉위하고 조서를 내려 다음 해를
개원改元하여
원년元年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