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四月에 帝大饗將士功臣하고 增邑更封하니 凡三百六十五人이로되 其外戚恩澤封者가 四十五人이라
定封鄧禹爲高密侯하야 食四縣하고 李通爲固始侯하고 賈復爲膠東侯하야 食六縣하고 餘各有差하고 已歿者는 益封其子孫하니 或更封支庶하다
帝在兵間久에 厭武事하고 且知天下疲耗하야 思樂息肩하고 自隴蜀平後로 非警急이면 未嘗復言軍旅러라
皇太子嘗問攻戰之事한대 帝曰 昔에 衛靈公이 問陳하니 孔子不對하시니 此非爾所及이라하더라
鄧禹賈復은 知帝偃干戈 修文德하고 不欲功臣擁衆京師하야 乃去甲兵하고 敦儒學하니
帝亦思念欲完功臣爵土하야 不令以吏職爲過하야 遂罷左右將軍하니 耿弇等이 亦上大將軍將軍印綬하고 皆以列侯就第하니 加位特進奉朝請이러라
帝方以吏事責三公이라 故功臣竝不用한대 是時列侯唯高密固始膠東三侯가 與公卿參議國家大事하야 恩遇甚厚라
帝雖制御功臣이나 而每回容宥其小失하고 遠方貢珍甘이면 必先徧賜諸侯하야 而太官無餘라
10-1-23 여름 4월에 광무제가 장사將士와 공신功臣들에게 크게 연향宴饗을 베풀고 식읍食邑을 더하거나 봉지를 바꿔주었으니, 모두 365인人이었는데, 그 가운데 외척外戚으로 은택恩澤을 입어 봉封해진 사람이 45인이었다.
등우鄧禹의 봉읍封邑을 정하여 고밀후高密侯로 삼아 4현縣을 식읍으로 주었고, 이통李通을 고시후固始侯로 삼았으며, 가복賈復을 교동후膠東侯로 삼아 6현縣을 식읍으로 주었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이 있게 시상하였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은 그 자손을 더하여 봉封하였으니, 혹은 지서支庶를 봉封하기도 하였다.
광무제는 오래도록 전쟁을 치르느라 전쟁이 싫어졌고 또 천하가 피폐해져서 백성들이 편히 쉬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고는 농隴과 촉蜀이 평정된 이후로 급한 경보가 아니면 다시 군대의 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황태자가 일찍이 공격하고 전쟁하는 일에 대해 묻자, 광무제가 말하기를
이는
하였다.
등우鄧禹와 가복賈復은 광무제가 전쟁을 종식하고 문덕文德을 닦으려 하며, 공신功臣들로 하여금 경사京師에서 병력을 보유하게 하지 않고자 한다는 것을 알아서 마침내 갑옷과 병기를 버리고 유학儒學에 돈독히 힘썼다.
그러자 광무제 또한
공신功臣들의
작위爵位와
토지土地를 완전하게 보전해주어
마침내 좌우의 장군을 파직하니,
경감耿弇(경감) 등이 또한
대장군大將軍의
인수印綬를 올리고 모두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이에 광무제는
의 지위를 더해준 다음
당시 광무제는 바야흐로 관리의 일을
에게 맡겼기 때문에
공신功臣들이 모두 등용되지 않았는데, 이때
열후列侯 가운데 오직
고밀후高密侯․
고시후固始侯․
교동후膠東侯 세 사람만이
공경公卿들과 함께 국가의
대사大事에 참여하여 의논해서 은혜와 예우가 매우 두터웠다.
황제는 비록
공신功臣들을 제어하였지만
그들의 작은 과실을 용서하였고, 먼 지방에서 진귀한 물건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면 반드시 먼저 제후들에게 두루 하사하여
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신功臣들이 모두 복록福祿을 보전하여 주벌誅罰과 견책譴責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