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歷代君鑑(1)

역대군감(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역대군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元狩二年春 以霍去病爲票騎將軍하야 將萬騎하야 出隴西하야 擊匈奴하니 轉戰六日 過焉支山千餘里하야 斬首虜獲甚衆하고 收休屠王祭天金人이라
復與公孫敖將數萬騎하야 俱出北地하고 張騫李廣俱出右北平이러니 去病深入二千餘里하야 踰居延過小月氏하야 至祁連山하야 斬首三萬하고 虜獲尤多하니 益封五千戶하다


8-1-13 원수元狩 2년(B.C. 121) 봄에 표기장군票騎將軍으로 삼아 1만 를 거느리고 농서군隴西郡에서 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니, 6일을 계속 싸워 언지산焉支山을 넘어 1천여 리를 들어가 참수하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고, 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을 거두었다.
여름에 곽거병이 다시 와 수만 를 거느리고 함께 북지北地에서 출동하고, 은 함께 우북평右北平에서 출동하였는데, 곽거병은 2천여 리를 깊이 들어가 거연居延을 넘어 소월지小月氏(소월지)를 지나서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러 3만 명을 참수하고 노획한 것은 그보다 많았으므로 5천 를 더 해주었다.


역주
역주1 霍去病 : 漢 武帝 때의 명장으로서, 18세 때 侍中이 되어 衛靑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서 공을 세워 冠軍侯로 봉해졌다. 3년 후인 B.C. 120년 驃騎將軍이 되어 甘肅으로 출정하였고, 그해 여름에는 북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흉노정벌에 나간 일이 여섯 차례였으며, 정예부대를 이끌고 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써서, 한나라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위청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는데 그 권세는 위청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24세로 죽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여 長安 근교의 茂陵에 무덤을 만들되, 일찍이 곽거병이 대승리를 거둔 祁連山의 형상을 본뜨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렸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傳〉)
역주2 休屠王 : 休屠는 흉노의 부족 명칭이다. 무제 때에 漢나라에 투항했던 金日磾가 휴도왕의 태자였다.(≪漢書≫ 권68 〈霍光金日磾傳〉)
역주3 金人 : 顏師古의 주에 의하면 지금의 佛象을 가리킨다.
역주4 公孫敖 : 前漢 義渠 사람이다. 무제 때 驃騎將軍으로 흉노를 치기 위해 代에서 출전했다가 병졸 7,000명을 잃어 庶人이 되었고, 그 후에 대장군 衛靑을 따라 출전해서 공을 세워 合騎侯에 봉해졌다. 다시 출전하여 흉노를 치다가 병졸을 많이 잃어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달아나서 민간에서 5, 6년을 지내다 발각되어 멸족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역주5 張騫 : 漢 武帝 때 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匈奴에게 포로가 되는 등 온갖 고초를 격고 13년 만에야 돌아왔는데, 西域 諸國에 한나라가 널리 알려지고 서역과의 교통 또한 크게 열리는 계기를 마련한 공으로 博望侯에 봉해졌다.(≪漢書≫ 권61 〈張騫李廣利傳〉)
역주6 李廣 : ?~B.C. 119. 前漢의 명장이다. 文帝, 景帝, 武帝 3대에 걸쳐 40여 년간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와 대치하면서 많은 전투를 치렀다. 용맹하고 활을 잘 쏘며 군사들을 잘 거느리니, 흉노가 飛將軍이라 일컬으며 두려워하였다. 평생에 걸쳐 쌓은 공적이 많았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마지막 출전에서 행군 중에 길을 잃었다가 대장군 위청의 질책과 심문을 받게 되자 자결하였다.(≪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