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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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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51
○民有建言朝政當以重農爲首務者한대
上顧謂侍臣曰 此言有理 國家重農이면 則百姓得盡力하야 天下富庶
古之重農 莫如周 后稷 以敎民稼穡開國하고 公劉 克篤前烈하고 文王時 耕者九一하고 武王 重民食하고 周公 述豳風하야 以戒成王하야 備言農事하니 當時 民用阜成하야 治協泰和
周以下 莫如西漢하니 高帝 困賈人하야 以抑其末하고 文帝 二十餘年 勤勤以勸農免租詔有司하고 武帝 雖以土木兵戈勞民이나 至其末年하야 亦知勸農作하야 以休息民이러니
至於元成之間하야 朝政固有乖闕이나 而百姓安業自若하야 天下富庶 幾二百年하니
成周享國 過於夏商하고 王莽簒漢 終以民心不忘而復之하니 養民之功大矣 朕於斯事 蓋寢食未嘗忘也라하다


34-1-51
백성 가운데 “조정朝政에서는 마땅히 중농重農을 가장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건언建言하는 자가 있었다.
선종이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말이 일리가 있다. 국가國家에서 농업을 중시하면 백성百姓이 힘을 다하여 천하가 해질 것이다.
나라 이후로는 서한西漢 시기만 한 때가 없었으니, 고제高帝고인賈人에게 곤액을 당하여 상업을 억제하였고, 무제武帝는 비록 토목공사와 전쟁으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였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는 또한 농업을 권장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생활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 연간에 이르러 조정朝政이 실로 분열되었지만 백성은 생업을 편안히 여기며 태연자약하여 천하가 부서富庶를 누린 기간이 거의 200년에 이르렀다.
국운國運을 누린 기간은 보다 길었고, 또 나라를 찬탈하였지만 백성을 기르는 공덕功德은 중대한 일이다. 그러므로 짐은 이 일을 잘 때나 먹을 때나 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富庶 :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다는 뜻이다. 孔子가 衛나라로 갈 때 “백성들이 많기도 하구나.[庶矣哉]” 하자, 冉有가 “이미 백성들이 많으면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旣庶矣 又何加焉]”라고 물었는데, 이에 공자가 “富裕하게 해주어야 한다.[富之]”라 대답하였고, “이미 부유해지면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旣富矣 又何加焉]”라고 물었을 때 공자가 “가르쳐야 한다.[敎之]”라고 대답했던 故事에서 온 말이다.(≪論語≫ 〈子路〉)
역주2 后稷은……開國하였고 : ≪孟子≫ 〈滕文公 上〉에 “后稷이 백성들에게 稼穡을 가르쳐서 五穀을 심고 가꾸게 하셨는데, 오곡이 成熟함에 人民이 잘 길러졌다.[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후직은 周나라의 始祖로 이름은 棄이다. 堯임금 때 農師가 되고 舜임금 때 后稷이 되어 농사를 맡은 장관으로서 國政을 도왔는데, 후세에는 마침내 棄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역주3 公劉는……하였다 : ≪書經≫ 〈周書 武成〉에 “아! 여러 제후들아 先王[后稷]이 나라를 세워 基業을 열어놓으셨는데, 公劉가 前人의 功烈을 돈독히 하고, 太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업의 터전을 닦았으며, 王季가 王家의 일에 근로하셨다. 그리고 우리 文考이신 文王께서 능히 공을 이룩하시어 크게 天命에 응하여 四方의 中夏를 어루만지셨다.[嗚呼群后 惟先王建邦啓土 公劉克篤前烈 至于大王 肇基王迹 王季其勤王家 我文考文王 克成厥勳 誕膺天命 以撫方夏]”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공유는 周나라 시조인 后稷의 증손으로, 西戎의 땅에서 지금의 陝西省 旬邑인 豳으로 옮겨 살면서 이곳에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詩經≫ 〈大雅 公劉〉에 보인다.
역주4 文王……하였고 : 井田法을 가리킨다. 사방 1里의 농지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을 公田, 주위의 여덟 구역을 私田으로 하여 여덟 농가에 나누어 농사짓게 하였는데, 여덟 집에서 공전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게 하였다.(≪孟子≫ 〈梁惠王 下〉․〈滕文公 上〉)
역주5 武王은……중시하였으며 : ≪論語≫ 〈堯曰〉에 “〈武王께서〉 소중히 여겼던 것은 백성의 食生活과 喪禮와 祭禮였다.[所重 民食喪祭]”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6 周公은……말하였으니 : 周公이 일찍이 豳 땅을 農政으로 잘 다스렸던 先祖 后稷과 公劉의 風化를 서술하고, 봉사인 樂師로 하여금 朝夕으로 이 詩를 成王 앞에서 외게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가르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詩經≫ 〈豳風 七月〉)
역주7 후하게 교화되어 : 원문의 ‘阜成’은 ‘兆民을 후하게 이룬다.’라는 뜻의 ‘阜成兆民’의 준말로, 안팎으로 政敎를 밝혀서 백성을 후하게 化成한다는 말이다.(≪書經≫ 〈周書 周官〉)
역주8 文帝는……내렸으며 : 文帝는 漢나라 제5대 황제로, 高祖 劉邦의 넷째 아들이고, 이름은 恒이다.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고 농경을 장려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사회를 안정시켜 태평성세를 이루었다. 문제는 등극한 다음날 농사를 중히 여기는 내용의 詔書를 반포하였고, 2년에는 籍田에서 勸農 의식을 행한 후에 그해 곡식을 절반만 거두는 半租의 명을 내렸으며, 12년에 다시 半租의 명을 내리고 이듬해에는 전답의 조세를 완전히 견감시킨 일이 있다.(≪史記≫ 권10 〈孝文本紀〉, ≪漢書≫ 권4 〈文帝紀〉)
역주9 元帝 : 前漢의 제8대 황제로, 이름은 奭이다. 宣帝의 아들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여 선제의 遺業을 쇠퇴시켰다.
역주10 成帝 : 前漢의 제9대 황제로, 이름은 驁이다. 실정을 하여 황제지배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외척이 권력을 잡았으며 특히 왕씨는 고관을 독점하여 王莽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역주11 成周 : 周公이 成王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렸던 周나라의 전성기로, 보통 西周의 美稱으로 쓰인다.
역주12 夏商 : 夏禹와 商湯을 이르는 말로, 夏나라와 殷나라를 가리킨다.
역주13 王莽 : 前漢 말기 新의 임금이다. 漢나라 哀帝를 폐하고 平帝를 독살한 뒤에 어린 아들 嬰을 세워 섭정하며 假皇帝라고 일컫다가 마침내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천자가 되어 국호를 新이라 하였다. 後漢의 光武帝에게 멸망되었다.
역주14 끝내……회복하였으니 : 後漢의 光武帝가 王莽을 격파하고 漢나라를 국운을 中興시킨 사실을 말한다. 광무제의 이름은 劉秀, 묘호는 世祖이고, 재위 기간은 27년에서 57년까지이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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