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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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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53
○史臣贊曰
高宗以公天下之心으로 擇太祖之後而立之하야 乃得孝宗之賢한대 聡明英毅하야 卓然爲南渡諸帝首稱하니 可謂難矣哉
卽位之初 銳志恢復이나 符離邂逅失利하니 重違高宗之命하야 不輕出師하며
又値金世宗之立하야 金國平治하야 無釁可乘이나 然易表稱書하고 改臣稱姪하며 減去歲幣하야 以定鄰好하니 金人易宋之心 至是亦寖異於前日矣
故世宗每戒群臣하야 積錢穀하고 謹邊備하야 必曰 吾恐宋人之和 終不可恃라하니 蓋亦忌帝之將有爲也
天厭南北之兵하야 欲休民生이라 故帝用兵之意弗遂而終焉이나
然自古人君 起自外藩하야 入繼大統이나 而能盡宮庭之孝 未有若帝하며 其間父子怡愉하야 同享高壽 亦無有及之者
終喪三年 又能却群臣之請而力行之하니 宋之廟號 若仁宗之爲仁 孝宗之爲孝 其無愧焉이라 其無愧焉이니라


25-1-53
사신史臣의 다음과 같이 하였다.
고종高宗천하天下를 공변되게 하는 마음으로 태조太祖의 후손 가운데 선택하여 제위帝位에 세워서 이에 어진 효종孝宗을 얻었는데, 효종은 총명聡明하고 영준英俊하여 우뚝하게 남송南宋의 여러 황제 가운데 으뜸이 되었으니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할 만하다.
처음 즉위했을 때 중원中原회복恢復하려는 의지를 가다듬었으나 부리符離의 전투에서 장준張浚의 군대가 궤멸潰滅되어 불리한 형세를 만나게 되자 거듭 고종高宗의 명을 어기며 경솔하게 군사를 출병하지 않았다.
또 시기적으로 이 즉위했을 때를 만나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이용할 만한 틈이 없었지만, 신하[]라는 호칭을 조카[]라고 바꾸었으며 세폐歲幣견감蠲減하여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정립하였으니, 이에 나라를 경시하던 금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이때에 이르러 또한 전날에 비해 점점 달라졌다.
그러므로 금 세종은 늘 군신群臣에게 경계하여 전곡錢穀을 비축하고 변방의 수비를 삼가게 하면서 반드시 ‘나는 저어컨대, 송나라 사람들이 강화講和한 것을 끝내 믿을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또한 효종이 장차 화의和議를 어길까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남북南北의 두 나라가 전쟁하는 것을 싫어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효종이 용병用兵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인군人君외번外藩(제후의 봉국封國)에서 일어나 도성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한 경우가 있었지만, 궁정宮庭에서의 효도를 다함이 효종과 같은 경우는 없었으며, 그 사이 부자간에 화락하여 함께 장수를 누린 경우가 또한 효종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3년의 상기喪期를 다하는 일에 있어서 또한 능히 군신群臣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힘써 거행하였으니, 송나라의 묘호廟號에서 예컨대 인종仁宗이라 하고 효종孝宗라 한 것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


역주
역주1 世宗 : 1123~1189. 女眞 출신의 金나라 제5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161년에서 1189년까지 28년이다. 1161년 海陵 왕이 南宋 征伐에 실패하자 遼陽에서 즉위하여 大定으로 改元하였다. 그는 전대의 문란을 시정하고 관리의 肅正과 재정의 긴축을 기하는 한편, 女眞에 대하여는 보호 정책을 취하여 토지를 정리하고 여진어를 장려하는 등 고유의 풍속을 일으키게 하여 당시 小堯舜으로 불렸다. 또 외국에 대하여는 평화 정책을 취하여 南宋과의 국교를 회복하기에 힘썼는데, 和議조건을 개정 완화하고 貢物을 銀 20만 냥, 絹 20만 필로 줄였으며, 양국 황제의 관계에서도 金帝는 숙부, 宋帝는 조카[姪]라는 명칭으로 고쳤다.
역주2 表文이라는……바꾸고 : 金나라와 宋나라의 군신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의미이다. 表文은 신하가 임금에게 慶賀ㆍ貢獻 등의 뜻을 아뢰는 글이고, 書狀은 使臣이 가져가는 글을 가리킨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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