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以公天下之心으로 擇太祖之後而立之하야 乃得孝宗之賢한대 聡明英毅하야 卓然爲南渡諸帝首稱하니 可謂難矣哉저
卽位之初에 銳志恢復이나 符離邂逅失利하니 重違高宗之命하야 不輕出師하며
又値金世宗之立하야 金國平治하야 無釁可乘이나 然易表稱書하고 改臣稱姪하며 減去歲幣하야 以定鄰好하니 金人易宋之心이 至是亦寖異於前日矣라
故世宗每戒群臣하야 積錢穀하고 謹邊備하야 必曰 吾恐宋人之和를 終不可恃라하니 蓋亦忌帝之將有爲也라
天厭南北之兵하야 欲休民生이라 故帝用兵之意弗遂而終焉이나
然自古人君이 起自外藩하야 入繼大統이나 而能盡宮庭之孝가 未有若帝하며 其間父子怡愉하야 同享高壽가 亦無有及之者라
終喪三年에 又能却群臣之請而力行之하니 宋之廟號가 若仁宗之爲仁과 孝宗之爲孝가 其無愧焉이라 其無愧焉이니라
“고종高宗이 천하天下를 공변되게 하는 마음으로 태조太祖의 후손 가운데 선택하여 제위帝位에 세워서 이에 어진 효종孝宗을 얻었는데, 효종은 총명聡明하고 영준英俊하여 우뚝하게 남송南宋의 여러 황제 가운데 으뜸이 되었으니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할 만하다.
처음 즉위했을 때 중원中原을 회복恢復하려는 의지를 가다듬었으나 부리符離의 전투에서 장준張浚의 군대가 궤멸潰滅되어 불리한 형세를 만나게 되자 거듭 고종高宗의 명을 어기며 경솔하게 군사를 출병하지 않았다.
또 시기적으로
금金 이 즉위했을 때를 만나
금金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이용할 만한 틈이 없었지만,
신하[
신臣]라는 호칭을 조카[
질姪]라고 바꾸었으며
세폐歲幣를
견감蠲減하여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정립하였으니, 이에
송宋나라를 경시하던 금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이때에 이르러 또한 전날에 비해 점점 달라졌다.
그러므로 금 세종은 늘 군신群臣에게 경계하여 전곡錢穀을 비축하고 변방의 수비를 삼가게 하면서 반드시 ‘나는 저어컨대, 송나라 사람들이 강화講和한 것을 끝내 믿을 수 없다.’ 하였으니, 대개 또한 효종이 장차 화의和議를 어길까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남북南北의 두 나라가 전쟁하는 것을 싫어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효종이 용병用兵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예로부터 인군人君이 외번外藩(제후의 봉국封國)에서 일어나 도성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한 경우가 있었지만, 궁정宮庭에서의 효도를 다함이 효종과 같은 경우는 없었으며, 그 사이 부자간에 화락하여 함께 장수를 누린 경우가 또한 효종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3년의 상기喪期를 다하는 일에 있어서 또한 능히 군신群臣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힘써 거행하였으니, 송나라의 묘호廟號에서 예컨대 인종仁宗을 인仁이라 하고 효종孝宗을 효孝라 한 것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부끄러울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