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隗囂使辨士張玄說竇融等曰 更始事已成이라가 尋復亡滅하니 此는 一姓不再興之效也라
今卽有所主
하야 便相係屬
이니 一
拘制
면 自令失柄
이니 後有危敗
면 雖悔無及
이라
方今豪桀競逐에 雌雄未决하니 當各據土宇하고 與隴蜀合從이면 高可爲六國이요 下不失尉佗니라
融等이 召豪桀議之하니 其中識者皆曰 今皇帝姓名이 見於圖書하니 自前世博物道術之士谷子雲夏賀良等이 皆言漢有再受命之符라 故劉子駿改易名字하야 冀應其占이러니
及莾末에 西門君惠謀立子駿이라가 事覺被殺한대 出할새 謂觀者曰 讖文不誤라 劉秀眞汝主也라하니 此皆近事暴着라 衆所共見者也니
況今稱帝者數人이로되 而洛陽土地最廣하고 甲兵最彊하고 號令最明하니 觀符命而察人事에 他姓殆未能當也라하니
衆議或同或異어늘 融이 遂决策東向하고 遣長史劉鈞等하야 奉書詣洛陽이라
先是에 帝亦發使遺融書以招之라가 遇鈞於道하야 卽與俱還이라
帝見鈞歡甚하야 禮饗畢에 乃遣令還할새 賜融璽書曰 今益州에 有公孫子陽하고 天水에 有隗將軍하니 方隴蜀相攻에 權在將軍이라
擧足左右에 便有輕重하니 以此言之컨대 欲相厚豈有量哉아
欲遂立桓文하야 輔微國인댄 當勉卒功業이요 欲三分鼎足하야 連衡合從인댄 亦宜以時定하라 天下未幷이나 吾與汝絶域하야 非相呑之國이라
今之議者는 必有任囂敎尉佗制七郡之計하리니 王者는 有分土하고 無分民하니 自適己事而已라하고 因授融涼州牧하다
璽書至河西하니 河西皆驚하야 以爲天子明見萬里之外라하더라
10-1-14
외효隗囂가
변사辯士인
장현張玄으로 하여금
등을 설득하게 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
이 이미 이루어졌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멸망하였으니, 이는
유씨劉氏가 다시
흥왕興旺하지 않을 징험이다.
이제는 주군으로 삼는 대상이 있어서 다시 서로 예속隷屬되어 있으니, 하루아침에 구금拘禁하면 절로 힘을 잃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혹시라도 위패危敗를 당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호걸豪桀들이 각축하여
자웅雌雄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들이 각각
토우土宇(영토)를 점거하고
과
합종合從하게 된다면 높게는
처럼 될 수 있고 낮아도
남해위南海尉 처럼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두융 등이 호걸을 불러 의논하니, 그 가운데 식견이 있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대前代부터 온갖 사물을 널리 알고
도술道術에 능한 선비인
과
등이 모두 말하기를 ‘
한漢나라가
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과
자字를 고쳐서 그 점괘에 부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후 왕망王莾 말기에 서문군혜西門君惠가 유자준을 옹립하려고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피살되었는데, 그가 나갈 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참언讖言의 글은 거짓이 아니다. 유수劉秀가 진정 그대들의 주인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근래의 일에서 드러났기에 사람들이 모두 직접 보았습니다.
더구나 지금 황제라고 칭하는 이가 몇 사람 있지만 낙양洛陽이 토지土地가 가장 광대하고 군사가 가장 강성하며 호령號令이 가장 분명하니, 적복부赤伏符의 글을 보고 인사人事를 살펴보았을 때 다른 성姓은 거의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같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두융이 마침내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기로 계책을 결단하고
유균劉鈞 등을 보내어 글을 받들어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광무제가 또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두융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주어 부르게 하였는데, 사자가 길에서 유균을 만나 바로 함께 돌아왔다.
광무제가 유균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예禮로 연향宴饗하고 마친 다음 돌려보낼 때에 두융에게 내린 새서璽書를 하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지금 익주益州에는 공손자양公孫子陽이 있고 천수天水에는 외장군隗將軍이 있으니, 촉蜀과 한漢이 서로 공격함에 권세(결정권)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발을 들어 왼쪽으로 향하느냐 오른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경중輕重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장군을 서로 후대厚待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마땅히 힘써
공업功業을 끝마쳐야 할 것이요,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합종合從하고
연횡連橫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때에 결정해야 할 것이다. 천하가 아직 합병되지 않았지만, 나와 그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병탄할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옛날
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니,
스스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하고는 인하여 두융을
양주목涼州牧에 제수하였다.
새서璽書가 하서河西에 이르니, 하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만리萬里 밖까지 밝게 내다본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