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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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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隗囂使辨士張玄說竇融等曰 更始事已成이라가 尋復亡滅하니 一姓不再興之效也
今卽有所主하야 便相係屬이니拘制 自令失柄이니 後有危敗 雖悔無及이라
方今豪桀競逐 雌雄未决하니 當各據土宇하고 與隴蜀合從이면 高可爲六國이요 下不失尉佗니라
融等 召豪桀議之하니 其中識者皆曰 今皇帝姓名 見於圖書하니 自前世博物道術之士谷子雲夏賀良等 皆言漢有再受命之符 故劉子駿改易名字하야 冀應其占이러니
及莾末 西門君惠謀立子駿이라가 事覺被殺한대할새 謂觀者曰 讖文不誤 劉秀眞汝主也라하니 此皆近事暴着 衆所共見者也
況今稱帝者數人이로되 而洛陽土地最廣하고 甲兵最彊하고 號令最明하니 觀符命而察人事 他姓殆未能當也라하니
衆議或同或異어늘 遂决策東向하고 遣長史劉鈞等하야 奉書詣洛陽이라
先是 帝亦發使遺融書以招之라가 遇鈞於道하야 卽與俱還이라
帝見鈞歡甚하야 禮饗畢 乃遣令還할새 賜融璽書曰 今益州 有公孫子陽하고 天水 有隗將軍하니 方隴蜀相攻 權在將軍이라
擧足左右 便有輕重하니 以此言之컨대 欲相厚豈有量哉
欲遂立桓文하야 輔微國인댄 當勉卒功業이요 欲三分鼎足하야 連衡合從인댄 亦宜以時定하라 天下未幷이나 吾與汝絶域하야 非相呑之國이라
今之議者 必有任囂敎尉佗制七郡之計하리니 王者 有分土하고 無分民하니 自適己事而已라하고 因授融涼州牧하다
璽書至河西하니 河西皆驚하야 以爲天子明見萬里之外라하더라


10-1-14 외효隗囂변사辯士장현張玄으로 하여금 등을 설득하게 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이 이미 이루어졌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멸망하였으니, 이는 유씨劉氏가 다시 흥왕興旺하지 않을 징험이다.
이제는 주군으로 삼는 대상이 있어서 다시 서로 예속隷屬되어 있으니, 하루아침에 구금拘禁하면 절로 힘을 잃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혹시라도 위패危敗를 당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호걸豪桀들이 각축하여 자웅雌雄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들이 각각 토우土宇(영토)를 점거하고 합종合從하게 된다면 높게는 처럼 될 수 있고 낮아도 남해위南海尉 처럼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두융 등이 호걸을 불러 의논하니, 그 가운데 식견이 있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대前代부터 온갖 사물을 널리 알고 도술道術에 능한 선비인 등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가 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과 를 고쳐서 그 점괘에 부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후 왕망王莾 말기에 서문군혜西門君惠가 유자준을 옹립하려고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피살되었는데, 그가 나갈 때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참언讖言의 글은 거짓이 아니다. 유수劉秀가 진정 그대들의 주인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근래의 일에서 드러났기에 사람들이 모두 직접 보았습니다.
더구나 지금 황제라고 칭하는 이가 몇 사람 있지만 낙양洛陽토지土地가 가장 광대하고 군사가 가장 강성하며 호령號令이 가장 분명하니, 적복부赤伏符의 글을 보고 인사人事를 살펴보았을 때 다른 은 거의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같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두융이 마침내 광무제光武帝에게 귀의하기로 계책을 결단하고 유균劉鈞 등을 보내어 글을 받들어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광무제가 또한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두융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주어 부르게 하였는데, 사자가 길에서 유균을 만나 바로 함께 돌아왔다.
광무제가 유균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연향宴饗하고 마친 다음 돌려보낼 때에 두융에게 내린 새서璽書를 하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지금 익주益州에는 공손자양公孫子陽이 있고 천수天水에는 외장군隗將軍이 있으니, 이 서로 공격함에 권세(결정권)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발을 들어 왼쪽으로 향하느냐 오른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경중輕重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장군을 서로 후대厚待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마땅히 힘써 공업功業을 끝마쳐야 할 것이요,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합종合從하고 연횡連橫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때에 결정해야 할 것이다. 천하가 아직 합병되지 않았지만, 나와 그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병탄할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옛날 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니, 스스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하고는 인하여 두융을 양주목涼州牧에 제수하였다.
새서璽書하서河西에 이르니, 하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르기를 “천자天子만리萬里 밖까지 밝게 내다본다.” 하였다.


역주
역주1 竇融 : 後漢 扶風 平陵 사람으로, 자는 周公이다. 新莽 말에 일찍이 王匡을 따라 綠林과 赤眉를 진압하고 波水將軍에 올랐다. 왕망이 15년 만에 망하자 更始의 대사마 趙萌에게 항복하여 중용되었다. 이후 更始에게 귀순하여 張掖屬國都尉가 되었다. 경시가 패하자 酒泉太守 梁統 등이 추천하여 河西 五郡의 大將軍事를 관할했다. 光武帝가 즉위하자 마침내 결단을 내려 귀순하고, 涼州牧과 冀州牧이 되고, 隗囂를 격파해 安豐侯에 봉해졌다. 建武 12년(36) 大司空과 將作大匠에 이르렀다. 衛尉의 일을 집행하면서도 성격이 겸허하여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많은 후손들이 고관에 오르는 등 번영했다. 시호는 戴이다.
역주2 更始의 일 : 更始는 漢나라 말기의 淮陽王 劉玄의 연호이다. 유현은 光武帝의 族兄으로 王莽 말기에 광무제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천자로 추대되었으나, 赤眉에게 패해 항복하였다가 피살되었다.(≪後漢書≫ 권11 〈劉玄列傳〉)
역주3 隴蜀 : 隴은 隗囂를 이르고 蜀은 公孫述을 이른다.
역주4 六國 : 戰國時代의 韓, 魏, 趙, 燕, 楚, 齊이니, 戰國時代에 각각 그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
역주5 趙佗 : 秦 始皇 때의 장수로 南海 龍川令으로 파견되었다가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를 틈타 桂林과 象郡, 남해를 병합하여 南越을 세우고 스스로 武王이라 칭하였다. 漢나라 呂后 때 독립하여 稱帝하고 한나라와 대립하다가 文帝 원년(B.C. 179)에 帝號를 없애고 臣從하는 조건으로 강화하여 나라를 유지하였는데, 뒤에 武帝 또한 이를 인정하여 南越의 왕으로 책봉하였다.(≪史記≫ 권113 〈南越列傳〉)
역주6 지금……보이니 : 光武帝가 長安에 있을 때, 同舍生인 彊華가 關中에서 赤伏符를 가져왔는데, 거기에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체포하면, 사방 오랑캐가 운집해 용이 들에서 싸우다가, 사칠의 즈음에는 불이 주인이 되리라.[劉秀發兵捕不道 四夷雲集龍鬪野 四七之際火爲主]”고 쓰여 있었는데, ‘四七’은 漢 高祖로부터 광무제가 일어난 초기까지가 280년이라는 말이고, ‘불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漢나라가 火德을 숭상한 것을 가리켜 한 말이다. 赤伏符는 王莽의 新나라 말기에 讖緯家가 만든 符籙이다.
역주7 谷子雲 : 漢나라 長安 사람 谷永으로, 그의 자가 子雲이다. 經書에 해박하고 특히 天文에 정통하였다. 前漢 元帝 때에 太常丞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천재지변의 현상을 가지고 조정의 득실을 논하였고, 成帝 때에는 황태후를 비롯해 외척 王氏들과 가까이 지낸 탓에 성제로부터 경계를 받기도 하였다.(≪漢書≫ 권85 〈谷永傳〉)
역주8 夏賀良 : 前漢의 術家이다. 成帝 때 甘忠可에게 〈天官曆〉 등을 배웠는데, 한나라의 왕력이 쇠하였으므로 개원하고 이름을 바꾸어 다시 천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哀帝가 그 말을 따라 建平 2년(B.C. 5)에 太初로 연호를 바꾸고 스스로를 ‘陳聖劉太平皇帝’라고 불렀다.(≪漢書≫ 권75 〈李尋傳〉)
역주9 다시……있다 : 다시 천명을 받아 中興한다는 의미이다. 漢나라 成帝 때 谷永이 上書하기를 “폐하께서 8대의 공업을 이어받으시어 陽數를 빼앗기는 말세를 맞아, 삼칠의 액운의 절기를 건너고 계십니다.[陛下承八世之功業 當陽數之摽季 涉三七之節紀]”라고 하였는데, 삼칠은 한나라가 세워진 후 210년 만에 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곡영의 예언이 있은 후 서한 건국 210년 만에 과연 新莽이 황위를 찬탈하였다. 또 哀帝 때 夏賀良이 말하기를 “赤精子의 비결에 漢나라의 曆運이 중간에 衰한다고 하였으니, 다시 天命을 받아야 합니다.[赤精子讖 漢家曆運中衰 當再受命矣]” 하였는데, 赤精子는 漢 高祖 劉邦이 赤帝의 정기로 태어났다 해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역주10 劉子駿 : 劉歆이다. 西漢 沛 사람으로, 자는 子駿인데, 후에 劉秀로 개명하고 자를 穎叔이라 하였다. 그는 劉向의 아들로, 어려서 詩書에 통달하여 부친과 함께 校書를 맡았다. 금문학이 권한을 잡고 있던 때에 고문경을 학관에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도서 분류 목록인 ≪七略≫을 저술하였다. 역법 등 수학에 밝아 ≪三統曆譜≫를 짓고 圓周形量器를 제작하여 원주율을 3.1547로 비교적 정확히 계산해냈는데, 이를 劉歆率이라고도 부른다.
역주11 長史 : 이때 사람들이 竇融을 추대하여 大將軍으로 삼았기 때문에 長史를 둔 것이다.
역주12 마침내……한다면 : 齊 桓公과 晉 文公은 春秋時代에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졌는데, 이들은 제후들을 규합하여 미약한 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강한 楚나라를 다스리니, 제후들이 모두 높여서 霸主로 삼았다.
역주13 任囂가……계책 :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南海尉 任囂가 병들자, 趙佗에게 7郡을 제압하는 계책을 가르쳐주었다. 7郡은 南海, 鬱林, 蒼梧, 合浦, 交趾, 九眞, 日南이 바로 이곳이다.
역주14 王者는……없으니 : 무릇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해주니, 封地를 받은 자가 각각 땅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漢書≫ 〈地理志〉 註에 “땅을 나누어 줌이 있다는 것은 封疆(국경)을 세움을 이르고, 백성을 나누어 줌이 없다는 것은 마음대로 왕래해서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음을 이른다.” 하였다.
역주15 (朝)[旦]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는데, 朝鮮 太祖 李成桂의 改諱가 ‘旦’이므로 저본에는 避諱하여 ‘旦’을 ‘朝’로 고친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旦’으로 바로잡았다.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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