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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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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2
○先是歲甲申 上年十七이라 連遭三喪하고 又値歲歉한대 與仲兄으로 極力營葬事하고 遂歷游光固汝潁諸州하니 凡三年이라
泗州盜起하야 列郡騷動어늘 辛卯夏五月 汝潁兵起하니 壬辰春二月 定遠人郭子興孫德崖等起兵하야 自稱元帥하고 攻拔濠州하야 據其城守之
上念無所逃難하야 不獲已乃以閏三月甲戌朔抵濠城하니 入門 子興見上狀貌奇偉異常人하고 遂留置左右하야 甚見親愛한대
凡有攻討 卽命以往이면 往輒勝하니 子興由是 兵益盛이라
是冬 元將賈魯 與月哥察兒 圍濠城한대 城中極力拒守
癸巳夏五月 元兵解圍去 城中乏糧하야 人艱食하니 上以鹽易米於懷遠하야 歸贍子興家하다
濠城 自元兵退 軍士多死傷한대 上乃歸鄕里하야 募兵得七百餘人以還하니 子興喜하야 以上爲鎭撫
是時 子興等 馭下無道 所部多暴橫한대 上觀其所爲하고 恐禍及己하야 乃以七百人으로 屬他將하고 而獨與徐達等二十四人으로 南去略定遠하야 得壯士三千人이라
後七日 率之而東하야 夜襲元橫澗山한대 黎明 入其營하니 棄軍遁去하고 降其民兵男女七萬이라
得精壯二萬하야 悉加訓練한대 上喩之曰 爾衆 初非不多爲吾所有 何也 蓋將無紀律하고 士不素練故爾 今練習爾等者 欲令知紀律也 宜共戮力하야 以建功業이라하니 衆皆羅拜曰 唯公所命이라
於是 率之하야 南略滁陽한대 道遇定遠人李善長來謁이어늘 上與語悅之하야 留置幕下하고 俾掌書記하야 遂與俱攻滁陽下之하다


29-1-2
이보다 앞선 갑신년(1344)은 태조의 나이 17세였다. 그때 태조는 연달아 을 당하고 다시 흉년을 만났는데, 중형仲兄과 함께 힘을 다해 장사葬事를 지내고 마침내 $
당시 사주泗州에서 도적이 봉기하여 열군列郡소동騷動이 일어났는데, 신묘년(1351) 여름 5월에 여주와 영주에서 군사가 일어나자 임진년(1352) 봄 2월에 정원定遠 사람 손덕애孫德崖 등이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원수元帥라 이른 뒤에 호주濠州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호주성濠州城에 웅거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태조는 난리를 피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부득이 윤3월 갑술일 아침에 호주성濠州城으로 갔다. 태조가 문으로 들어갔을 때 곽자흥은 태조의 씩씩한 모습이 보통 사람과 달리 특이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곁에 머물러두고 매우 친애親愛하였다.
그 후 무릇 공격攻擊토벌討伐이 있을 때마다 출전하도록 명하면 가서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으니, 곽자흥은 이로부터 병력이 더욱 강성하게 되었다.
섬국공陝國公 곽자흥郭子興섬국공陝國公 곽자흥郭子興
이해 겨울에 나라 장수 가로賈魯월가찰아月哥察兒와 함께 호주성을 포위하였는데, 태조는 성안에서 힘을 다해 항거하며 성을 지켰다.
계사년(1353) 여름 5월에 원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떠나갔을 때 성안에 양식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자, 태조는 회원懷遠에서 소금으로 쌀을 바꾸어 돌아와 곽자흥의 근거지(호주성)를 구제하였다.
호주성은 원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로 군사들이 많이 죽거나 다쳤는데, 태조가 이에 향리鄕里로 돌아가 병사를 보집하여 700여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곽자흥이 기뻐하여 태조를 진무鎭撫로 삼았다.
이때 곽자흥 등은 아랫사람을 거느림에 가 없었으므로 소속 에 횡포를 자행한 것이 많았다. 태조는 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700명의 군사를 다른 장수에게 맡기고, 홀로 등 24인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정원定遠을 공략하여 장사壯士 3,000명을 얻었다.
중산왕中山王 서달徐達중산왕中山王 서달徐達
7일 후에 그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밤에 횡간산橫澗山에서 원나라 장수 장지원張知院을 기습하였는데, 새벽에 그 군영軍營에 들어가 보니 장지원張知院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나고 그 백성과 군사 남녀 7만 명이 항복하였다.
이에 정예 장병壯兵 2만을 얻어 모두 훈련을 시켰는데, 당시 태조가 그들을 깨우치기를, “그대들 군중이 처음에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아침에 나의 소유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대개 장수는 기율紀律이 없고 군졸은 평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들을 익숙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기율紀律을 알게 하려는 것이니, 의당 함께 힘을 다하여 공업功業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니, 군사들이 모두 열을 지어 절하며 말하기를, “오직 공이 명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선장李善長이선장李善長
이에 그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저양滁陽을 공략하였다. 당시 도중에 정원定遠 사람 이 와서 배알하였는데, 태조가 함께 이야기해보고는 기뻐하여 막하幕下에 머물러두어 서기書記를 관장하게 하고 마침내 함께 저양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역주
역주1 세 번의 상 : 당시 심한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아 부모와 형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明史≫ 권1 〈太祖本紀〉)
역주2 3년……돌아다녔다 : 당시 태조는 부모상을 당한 뒤에 의탁할 곳이 없어서 皇覺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1개월 뒤에는 合肥에서 걸식하며 다니다가 도중에 병에 걸려 고생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병이 나은 후 3년 동안 光州․固州․汝州․潁州 등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황각사로 돌아갔다.(≪明史≫ 권1 〈太祖本紀〉)
역주3 郭子興 : ?~1355. 定遠 출생이다. 젊어서부터 俠客들과 사귀었으며, 元나라 말기에 紅巾徒로서 군사를 일으켜, 濠州를 빼앗고 元帥를 자칭하였다. 이때 朱元璋이 그의 軍門에 참가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으며, 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바로 후일의 馬皇后이다. 그는 주원장의 협력으로 여러 차례 元軍을 격파하였으나, 동지간에 내분이 그치지 않아 항상 근심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370년에 滁陽王으로 追敍되었다.
역주4 (朝)[旦]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朝’는 朝鮮 太祖 李成桂가 왕위에 오른 뒤 ‘旦’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避諱하여 ‘朝’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글자인 ‘旦’으로 돌려놓았다.
역주5 徐達 : 1332~1385. 濠州 출신으로, 자는 天德이다. 집안 대대로 농민 출신이다. 22세 때 郭子興의 配下에 있던 朱元璋의 부하가 되어, 孫德崖에게 붙잡힌 주원장을 구출한 뒤로 신뢰를 받아, 揚子江을 건너 集敬路(南京)를 공략한 뒤 대장이 되고, 鎭江을 점령한 뒤 統軍元帥가 되었다. 1361년 주원장이 吳國公이 되자 江南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서 江西의 漢帝 陳友諒을 격파하고, 주원장이 吳王이 되자 左相國에 오르고, 1367년 蘇州의 오왕 張士誠을 공략한 무공으로 信國公에 봉해졌다. 연이어 元軍 토벌에서는 25만의 軍勢를 총지휘하였고, 주원장이 應天府(南京)에서 즉위하자 武官 제일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1370년 魏國公에 봉해지고 5,000석의 祿을 받았다.
역주6 李善長 : 1314~1390. 濠州 定遠 사람으로, 자는 百室이다. 明나라의 開國功臣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했고, 지략이 뛰어났다. 뒤에 朱元璋의 참모가 되어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參議, 右相國, 光祿大夫, 左柱國, 太師, 中書左丞相 등을 역임하고, 宣國公, 韓國公에 봉해졌다. ≪元史≫ 편수를 감수했고, ≪祖訓錄≫, ≪大明集禮≫ 등을 편찬했다.
역주7 (知院老張于)[將張知院於] : 저본에는 ‘知院老張于’로 되어 있으나, ≪明史≫ 권1 〈太祖本紀〉에 의거하여 ‘將張知院於’로 바로잡았다.
역주8 (老張)[知院] : 저본에는 ‘老張’으로 되어 있으나, 앞의 내용에 의거하여 ‘知院’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朝)[旦]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朝’는 朝鮮 太祖 李成桂가 왕위에 오른 뒤 ‘旦’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避諱하여 ‘朝’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글자인 ‘旦’으로 돌려놓았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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