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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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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군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三年春三月 封丙吉等爲列侯하고 故人阿保賜物有差하다
丙吉爲人 深厚不伐善하고 自曾孫遭遇 絶口不道前恩이러니 會掖庭宮婢自陳嘗有阿保之功하야 辭引使者丙吉知狀한대
上親見問然後 知吉有舊恩而終不言하고 大賢之러라
初張賀嘗爲弟安世하야 稱皇曾孫之材美及徵恠하니 安世輒絶止하야 以爲少主在上하니 不宜稱述曾孫이니라
及帝卽位而賀已死 上謂安世曰 掖庭令平生稱我할새 將軍止之하니 是也
至是下詔曰 朕微眇時 丙吉史曾許舜 皆有舊恩하고 張賀輔導朕躬하야 修文學經術하니 恩惠卓異하고 厥功茂焉이라
詩不云乎 無德不報라하니 封賀子彭祖及吉曾舜하야 皆爲列侯하고 故人下至 皆受官祿田宅財物하야 各以恩淺深報之하라


9-2-12 원강元康 3년(B.C. 63) 봄 3월에 등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고, 친구들과 보모保母들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하사하였다.
병길은 됨됨이가 관후寬厚하고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았다. 이 즉위한 뒤로 예전에 자신이 어린 선제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이때 액정궁掖庭宮의 계집종이 자기가 일찍이 선제를 길러준 공이 있다고 스스로 진술하고, 사자使者인 병길이 당시의 상황을 안다고 끌어들였다.
선제가 직접 만나서 물은 뒤에 병길이 옛날에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있는데 끝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어질게 여겼다.
처음에 가 일찍이 동생인 에게 황증손皇曾孫의 자질이 아름답고 가 있는 것을 칭송하였는데 장안세가 그때마다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가 위에 계시니 증손을 일컬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선제가 즉위했을 때에는 장하가 이미 죽은 뒤였다. 선제가 장안세에게 말하기를, “액정령掖庭令이 평소 나를 칭송할 때에 장군이 제지한 것은 옳았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어릴 때에 병길丙吉이 모두 옛 은혜가 있었고, 장하張賀가 짐의 몸을 보도輔導하여 문학文學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으니 은혜가 매우 크고 그 공이 성대하다.
에 이르지 않았던가. 라고 하였으니, 장하의 아들 장팽조張彭祖와 병길과 사증과 허순을 하여 모두 열후列侯로 삼고, 친구들과 아래로 군저옥郡邸獄여도女徒로서 일찍이 나를 돌봐준 공이 있는 자들은 모두 관록官祿전택田宅재물財物을 받게 해서 각각 은혜의 크기에 따라 보답하라.” 하였다.


역주
역주1 丙吉 : ?~B.C. 55. 漢 宣帝 때의 명재상이다. 자는 少卿이다. 武帝의 아들 衛太子 劉據가 巫蠱의 禍에 걸려 억울하게 죽었다. 당시 위태자 일족이 모두 주살되었지만 갓난아기였던 태자의 손자 劉病已만은 기저귀를 찬 채 郡邸獄에 수감되었다. 이때 廷尉監으로 있던 丙吉이 태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아이를 불쌍히 여겨 여죄수 둘을 골라 皇曾孫 유병이에게 젖을 먹여 기르게 하였다. 이듬해 天機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장안의 감옥 안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자 무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옥에 갇힌 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병길은 문을 닫고 밤새 버티며 무고한 황증손을 죽일 순 없다 하였고, 무제는 하늘의 뜻임을 깨닫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이에 병길이 병이의 할머니인 史氏 집안으로 아이를 보내고, 掖庭에 조서를 내려 황증손을 돌보게 하였다. 후에 유병이가 제위에 올라 宣帝가 되었으나 병길은 자신의 私恩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았으며 선제 또한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霍光 일가가 멸족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선제는 병길을 博阳侯에 봉하였다.(≪漢書≫ 권73 〈丙吉傳〉)
역주2 曾孫 : 宣帝를 가리킨다. 武帝의 長子 劉據가 戾太子이고, 여태자의 아들이 史皇孫 劉進이고, 사황손의 아들이 선제이므로, 선제는 무제의 曾孫이다.(≪漢書≫ 권8 〈宣帝紀〉)
역주3 張賀 : 前漢 사람으로 張湯의 아들이고, 張安世의 형이다. 일찍이 戾太子를 섬겼었는데, 여태자의 은혜를 생각하여 宣帝가 어릴 때에 掖庭令으로 있으면서 극진히 돌봐주었다.(≪漢書≫ 권8 〈宣帝紀〉)
역주4 張安世 : 前漢 사람으로 자는 子孺이고, 張湯의 아들이다. 昭帝가 죽은 뒤에 대장군 霍光과 함께 昌邑王을 세웠다가 폐하고 宣帝를 옹립하는 계책을 구상하였다. 곽광이 죽은 뒤 大司馬 領尙書事에 제수되었으며, 조심하고 주밀하여 선제의 신임을 받았다. 博學多識하여 “세 상자의 없어진 책을 장안세가 기억하였다.[亡書三篋 安世識之]”라는 고사도 널리 인용되고 있으며, 7代에 걸쳐 侍從을 지낸 일로 權門貴族의 대명사로도 불린다.(≪漢書≫ 권59 〈張湯傳〉)
역주5 괴이한 징조 : 宣帝의 온 몸과 발바닥까지 털이 나 있고, 누워 있으면 자줏빛이 나며, 떡집에서 떡을 사면 그때마다 그 떡집에 떡이 매우 잘 팔렸던 일을 가리킨다.(≪漢書≫ 권8 〈宣帝紀〉)
역주6 少主 : 武帝가 죽고 昭帝가 8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少主라고 칭한 것이다.(≪漢書≫ 권7 〈昭帝紀〉)
역주7 史曾 : 宣帝가 어릴 때에 中郎將으로서 돌봐준 공이 있는 사람이다.(≪漢書≫ 권8 〈宣帝紀〉)
역주8 許舜 : 宣帝가 어릴 때에 長樂衛尉로서 돌봐준 공이 있는 사람이다.(≪漢書≫ 권8 〈宣帝紀〉)
역주9 덕에……없다 : ≪詩經≫ 〈大雅 抑〉에 보인다.
역주10 郡邸獄復(복)作嘗有阿保之功者 : 당시 廷尉監인 丙吉이 皇曾孫을 양육하게 했던 胡組와 趙徵卿(혹 郭徵卿)을 가리킨 것이다. ‘復作’은 ≪漢書≫ 권8 〈宣帝紀〉 顏師古의 주에 보면 復은 음이 服이니, 刑徒를 풀어줌을 이른다. 詔令으로 사면령을 내려서 항쇄와 죄수복을 제거하였다가 다시 죄를 범하면 徒刑을 시키되, 평민과 똑같이 할 수 없으므로 다시 관청에서 노역을 시켜 그 본죄의 연월일을 채우게 하였으니, 법률에서 이것을 이름하여 ‘復作’이라 한다 하였다.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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