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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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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39
○十二月 歷代名臣奏議書成하다
先是 上以璽書諭皇太子하야 令翰林儒臣黃淮 楊士奇等으로 採古名臣直言 如張良對漢高 鄧禹對光武 諸葛武侯對昭烈 及董賈劉向谷永陸贄奏疏之類하야 彙類以便觀覽이러니 至是書成以進한대
上覽而嘉之하야 賜名歷代名臣奏議하다
因謂侍臣曰 致治之道 千古一揆 君能納善言하고 臣能盡忠不隱이면 天下未有不治
觀是書 足以見當時人君之量 人臣之直이니 爲君者 以前賢所言으로 便作今日耳聞하고 爲臣者 以前賢事君之心爲心이면 天下國家之福也라하고 遂命刊印以賜皇太子皇太孫及大臣하다


32-1-39
12월에 가 완성되었다.
이보다 앞서 태종이 황태자에게 조서를 내려 유시諭示해서 한림유신翰林儒臣 등으로 하여금 옛날 명신名臣들의 직언으로 장량張良 고조高祖에게 한 것과 광무제光武帝에게 한 것과 제갈무후諸葛武侯소열昭烈에게 한 것 및 주소奏疏 등을 채집하여 유별類別로 모아서 보기 편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어 올렸다.
태종이 보고 가상히 여겨 ≪역대명신주의≫라는 이름을 내렸다.
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
이로 인하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다스림을 이루는 도는 천고千古토록 똑같은 법이니, 임금이 능히 선한 말을 받아들이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여 숨김이 없으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은 적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 당시 임금의 도량과 신하의 곧음을 볼 수 있으니, 임금된 자가 전현前賢이 말한 것을 오늘 귀로 들은 것으로 여기고 신하된 자가 전현이 임금을 섬긴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으면 천하 국가의 복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간행하여 황태자와 황태손 및 대신에게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역주
역주1 歷代名臣奏議 : 明나라 永樂 14년(1416)에 黃淮․楊士奇 등이 황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으로, 모두 350권이다. 殷․周 시대에서 宋․元 시대에 이르는 名臣들의 奏議를 64門에 나누어 수록하였다. ≪通鑑≫, ≪三通≫과 함께 역대 典制의 연혁과 정치의 득실을 고증할 수 있는 책으로 평가된다.(≪四庫全書總目提要≫ 권55 〈史部11 詔令奏議類〉)
역주2 黃淮 : 1367~1449. 明나라 浙江 永嘉 사람으로, 자는 宗豫이다. 洪武 30년(1397)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永樂 연간에 解縉 등과 文淵閣에서 독서하였다. 右春坊大學士를 지내다가 漢王 高煦의 참소로 10년간 옥살이를 하였고, 洪熙 초에 복관되어 武英殿大學士를 겸하고 楊榮 등과 內制를 관장하였다. 벼슬은 戶部尙書에까지 올랐다. 저서에 ≪省愆集≫과 ≪黃介庵集≫이 있다.
역주3 楊士奇 : 1365~1444. 明나라 江西 泰和 사람으로, 이름은 楊寓이고, 자가 士奇인데 자로 행세하였다. 호는 東里先生이다. 惠帝 建文 초에 천거를 받아 翰林에 들어가 ≪太祖實錄≫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고, 太宗이 즉위한 뒤 編修에 임명되고, 內閣에 들어가 楊榮 등과 함께 정무에 참여하였다. 이후 5대에 걸쳐 내각에 있으면서 輔臣으로 40여 년을 봉직하였다. 禮部侍郞 兼 華蓋殿大學士에 올라 兵部尙書를 겸했는데, 청렴하고 유능함으로 천하의 칭송을 들었다. 楊榮․楊溥와 함께 三楊으로 불렸다. 시호는 文貞이다. 저서에 ≪東里全集≫, ≪文淵閣書目≫ 등이 있다.
역주4 鄧禹 : 2~58. 東漢 南陽 新野 사람으로, 자는 仲華이다. 젊어서 長安에 유학하여 光武帝 劉秀와 친하게 지냈는데, 王莽의 新 말에 광무제를 따라 종군하여 銅馬軍을 진압하였다. 광무제에게 河北을 근거지로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기회를 기다려 천하를 취하라고 조언해 신임을 얻었으며, 또 前將軍이 되어 劉玄의 장군 王匡과 成丹 등을 격파하였다. 광무제가 즉위한 뒤에는 大司徒에 오르고 酇侯에 봉해졌으며, 여러 지역을 다니며 항복을 유도해 부대가 ‘百方’이라고 불렸다. 明帝 때 太傅에 올랐다. 시호는 元이다.
역주5 董賈 : 漢나라의 학자 董仲舒와 賈誼의 합칭이다. 董仲舒는 前漢 때 經學家로 廣川 사람이다. 景帝 때 박사가 되었으며 武帝 때에는 江都相과 膠西相을 역임하였다. 〈賢良對策〉을 올려 유학을 존중하고 백가 사상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경학의 지위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저술에 힘쓰다 생을 마쳤다. ≪春秋≫에 밝아 ≪春秋繁露≫를 지었다. 賈誼는 전한 때 河南 洛陽 사람으로, 廷尉 吳公의 천거로 20여 세에 文帝의 부름을 받아 博士에 제수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아 한 해 만에 太中大夫에 올랐다.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논하다 周勃과 灌嬰 등의 비방을 받아 長沙王의 太傅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梁 懷王의 태부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흉노가 변방을 침략하고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제어할 방책으로 제후왕을 많이 봉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하고 흉노에 대한 강경책을 쓸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상소에서 건의하는 내용을 통곡할 만한 일[可爲痛哭者] 한 가지, 눈물 흘릴 만한 일[可爲流涕者] 두 가지, 길게 탄식할 만한 일[可爲長太息者]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문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33세로 요절하였는데, 〈鵩鳥賦〉, 〈弔屈原賦〉, 〈過秦論〉, 〈論積貯疏〉, 〈陳政事疏〉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역주6 劉向 : B.C. 77~A.D. 6. 前漢 말기 沛縣 사람이다. 본명은 更生이고, 자는 子政이다. 楚元王 劉交의 4세손이고, 劉歆의 아버지다. ≪春秋穀梁傳≫을 공부했고, 陰陽休咎論으로 時政의 득실을 논하면서 여러 차례 외척이 권력을 잡는 일에 대해 경계했다. 궁중 도서의 교감에도 노력하여 해제서 ≪別錄≫을 만들어 중국 목록학의 비조로 간주된다. 楚나라 屈原의 辭賦와 그의 문인 宋玉의 작품을 모아 ≪楚辭≫를 편집하였으며, 춘추전국시대로부터 漢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언행을 분류하여 ≪新序≫와 ≪說苑≫을 편찬했다. 그리고 ≪詩經≫과 ≪書經≫에 나타난 여인들 중 모범과 경계로 삼을 만한 사례를 모아 ≪列女傳≫을 저술했다. 그 밖의 저서에 ≪五經通義≫, ≪洪範五行傳≫ 등이 있다.
역주7 谷永 : ?~B.C. 8. 前漢 京兆 長安 사람으로, 본명은 竝이고, 자는 子雲이다. 經傳에 해박하였고, 특히 ≪京氏易≫에 정통하였다. 元帝 때에 太常丞이 되어 자주 상소하여 災異를 가지고 조정의 득실을 추론하였다. 成帝 때에 給事中이 되어 천자의 허물을 과감하게 지적했으나 權臣의 과실은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권신인 王鳳 등 일파에게 아부함으로써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성제가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北地太守를 거쳐 大司農에까지 올랐다.
역주8 陸贄 : 754~805. 唐나라 蘇州 嘉興 사람으로, 자는 敬輿이다. 18세에 進士가 되어 德宗의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후로 천자 곁에서 文翰을 담당하여 詔書를 기록함에 사정을 곡진히 하여 機會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고, 임금에게 드리는 奏議를 잘 짓기로 더욱 유명하였다. 뒤에 兵部侍郞에 임명되고 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가 裴延齡의 참소에 의해 忠州別駕로 폄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宣公이다. 死後에 후인들이 그의 奏議를 모아 ≪陸宣公奏議≫를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翰苑集≫이 있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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