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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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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9
○喬行簡進讀高宗寶訓謹名器篇이라가 至祖宗朝敎坊官有求爲郡者太祖以唐莊宗爲鑑不與하야 帝曰 用伶人爲郡守 非獨輕褻名器 亦必爲民害로다하다
行簡奏乞謹守祖宗法度則名器自不濫이니이다하니 帝曰 祖宗法度 自是精密하니 豈容不守리오하다


26-1-9
이 ≪고종보훈高宗寶訓≫ 〈근명기謹名器진독進讀하다가 ‘조종조祖宗朝 가운데 군수郡守가 되기를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조太祖께서 의 일을 귀감으로 삼아 허락하지 않았다.’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이종이 이르기를, “영인伶人을 등용하여 군수郡守로 삼으면 명기名器를 경솔하게 더럽힐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하였다.
교행간이 상주上奏하여 “삼가 조종祖宗법도法度를 지키면 명기名器가 절로 남용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청하니 이종이 이르기를, “조종의 법도가 본래 정밀精密하니 어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역주
역주1 喬行簡 : 1156~1241. 宋나라 婺州 東陽 사람으로, 자는 壽朋이고, 呂祖謙에게 배웠다. 光宗 紹熙 4년(1193)에 진사가 되고, 監司 및 州府官을 역임한 뒤 거듭 승진하여 權工部侍郞까지 올랐다. 理宗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時政에 대해 논했는데, 현실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아 參知政事 兼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端平 원년(1234)에 조정이 金나라가 망한 틈을 타 河南을 수복하려고 하자 글을 올려 반대하면서 법도가 무너지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며 財用이 풍족하지 않고 군량이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아 병사를 일으킨 뒤 民變이 뒤따를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端平 3년(1236)에 左丞相으로 승진하고, 嘉熙 3년(1239)에 平章軍國重事에 오르고 肅國公에 봉해졌다. 항상 요충지를 순시하면서 節度宣撫使를 세울 것을 건의했고, 병사로 夔州路를 방비하게 했다. 다음 해 少師와 保寧軍節度使에 오르고, 魯國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文惠이다. 저서에 ≪周禮總說≫, ≪孔山文集≫ 등이 있다.
역주2 敎坊官 : 敎坊을 주관하는 관리를 말한다. 敎坊은 唐 玄宗 때 설치하여 궁중 여인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던 곳이다. ≪唐書≫ 〈百官志〉에 “開元 2년에 교방을 蓬萊宮 곁에 두었다. 京都에 좌우 교방을 두어 배우와 잡극을 맡아보았다.” 하였다.
역주3 後唐 莊宗 : 五代時代 後唐의 2대 황제 李存勗을 말한다. 唐나라 때 黃巢를 격파하여 晉王에 봉해진 李克用의 아들로, 小名은 亞子이다. 본래 광대의 연극과 음악을 좋아하였다. 즉위하여 처음에는 북쪽으로 契丹을 물리치고 동쪽으로 燕과 梁을 멸망시킨 뒤에 後唐을 건국하여 洛陽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로 교만 방자해져서 정치를 문란하게 하다가 자신이 발탁하여 從馬直指揮使로 삼았던 伶人 郭從謙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화살에 맞아 죽었다. 4년간 재위하였으며, 연호는 同光이다.(≪新五代史≫ 권4 〈唐本紀〉)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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