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年四月에 御邇英閣하야 謂講讀官曰 易旨精微하야 朕每以疑難問卿等하니 得無爲煩乎아 曾公亮對曰 臣等幸承聖問하야 懼不能對하니 豈敢言煩이리오
帝曰 卿等宿儒博學이라 多所發明하니 朕雖盛暑나 亦未嘗倦호라 但恐卿等勞爾라 丁度復進曰 自古帝王이 臨御日久면 非內惑聲色이면 則外窮兵黷武어늘 陛下卽位三十年에 孜孜聖學이 雖堯舜之聡明이라도 不是過라하고 因頓首稱謝하더라
尋詔講讀官當講讀者立侍敷對하고 餘皆坐侍하니 自景祐以來皆立侍러니 至是遂爲永制하다
嘗講書無逸할새 帝曰 朕深知享國之君이 宜戒逸豫니라 楊安國言 舊有無逸圖하니 請列於屛間한대
帝曰 朕不欲坐席背聖人之言
이라 當別書置之左方
이라하고 因命丁度取
孝治聖治廣要道四章
하야 對爲右圖
하고 乃令王洙書無逸
하고 蔡襄書孝經
하고 又命翰林學士承旨王拱辰爲二圖序 而襄書之
하다
황우皇祐 3년(1051) 4월에 인종이 이영각邇英閣에 납시어 강독관講讀官에게 이르기를, “≪주역周易≫의 뜻이 정미精微하여 짐이 매번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경들에게 물으니 번거로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증공량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다행스럽게도 성상의 질문을 받들어 대답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감히 번거로움을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인종이 이르기를, “경들은 숙유宿儒로서 박학博學하므로 밝혀낸 것이 많으니 짐이 비록 한여름이지만 또한 나태한 적이 없었다. 다만 경들의 수고가 염려될 뿐이다.” 하니, 정도丁度가 다시 진언進言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즉위한 지 오래되면 안으로 성색聲色에 유혹되지 않으면 밖으로 끝없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폐하께서는 즉위한 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하시니 비록 요순堯舜 같은 총명한 분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 돈수頓首하고 칭사稱謝하였다.
이어
강독관講讀官 중에
강독講讀을 담당한 자는
입시立侍하여 대답하고 나머지는 모두
좌시坐侍하라고 명하니,
이래로 모두 입시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영구적인 제도로 확립되었다.
수무일도受無逸圖
일찍이 ≪
서경書經≫ 〈
무일無逸〉편을 강할 때에 인종이 이르기를, “짐은 재위에 있는 임금은 안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니,
이 말하기를, “옛날에 〈
무일도無逸圖〉가 있었으니, 병풍 사이에 세워두소서.” 하였다.
인종이 이르기를, “짐은 성인의 말씀을 등지고 앉아 있고 싶지 않다. 특별히 써서 왼쪽에 두겠다.” 하고, 정도에게 명하여 ≪
효경孝經≫의 〈
천자天子〉ㆍ〈
효치孝治〉ㆍ〈
성치聖治〉ㆍ〈
광요도廣要道〉 네
장章을 가지고
우도右圖를 만들게 하고, 이어
에게 명하여 〈무일〉편을 쓰게 하고,
에게 ≪효경≫을 쓰게 하고, 또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에게 두
도圖의
서문序文을 짓게 하고 채양에게 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