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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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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군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上嘗曰 朕每臨朝하야 欲發一言 未嘗不三思하니 恐爲民害 是以 不多言하노라
給事中知起居事杜正倫曰 臣職在記言이라 陛下之言이면 臣必書之 豈徒有害於今이리오 亦恐貽譏於後니이다
上悅하야 賜絹二百段하고 又曰 梁武帝君臣 惟談苦空이라가 矦景之亂 百官不能乘馬하고 元帝爲周師所圍 猶講老子하야 百官戎服以聽하니 此深足爲戒
朕所好者 唯堯舜周孔之道 以爲如鳥有翼이요 如魚有水하야 失之則死 不可暫無耳니라


16-1-20 이 일찍이 이르기를, “은 늘 조회에 임할 때마다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을 때 세 번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백성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하니,
급사중給事中 지기거사知起居事 이 말하기를, “기언記言의 직책에 있으므로 폐하陛下께서 말에 실수가 있으면 신이 반드시 기록할 것이니, 어찌 어찌 한갓 지금 피해가 있을 뿐이겠습니까. 또한 후세에 원망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 기뻐하여 명주 200을 하사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 무제武帝 때에 임금과 신하들은 오직 괴롭고 공허한 이치만 담론하다가 이 두 가지 일은 경계로 삼을 만하다.
이 좋아하는 것은 오직 임금과 임금, 주공周公공자孔子이니, 생각건대 마치 새에게 날개가 있고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아서 날개와 물을 잃으면 죽게 되니, 이 는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될 따름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杜正倫 : 唐나라 相州 洹水 사람으로, 隋 文帝 때 秀才로 천거되어 시험에 합격하였다. 唐 高祖 武德 연간에 齊州總管府 錄事參軍이 되었는데, 당시 太宗 李世民이 추천하여 秦王府文學館이 되었다. 글을 잘 짓고 佛經에도 조예가 깊었다. 태종 貞觀 연간에 魏徵의 천거로 兵部員外郞으로 옮기고 給事中과 中書侍郞이 되었는데, 일을 논한 것이 태종의 뜻에 맞았다.
역주2 矦景의 난리 : 矦景은 본래 北魏 懷朔鎭 사람으로 字는 萬景이다. 처음에 北魏 爾朱榮의 장수가 되었다가 뒤에 高歡에게 돌아갔다. 고환이 죽자 梁나라에 귀부하여 河南王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建康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梁 武帝가 臺城에서 포위되어 굶어 죽자, 후경이 皇位에 올라 漢帝로 자칭하였다. 그가 도처마다 불을 지르고 약탈하여 長江의 하류 지역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 사건을 史書에서 ‘矦景의 난리[侯景之亂]’라고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양나라 장수 陳霸先과 王僧辯 등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달아나다가 그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역주3 梁나라……못하였고 : 武帝는 梁나라를 창건한 임금인 蕭衍이다. 그는 佛敎에 빠져 세 차례나 절에 가서 捨身하였는데, 侯景의 반역으로 성이 함락되어 마침내 굶어 죽었다.
역주4 元帝는……들었으니 : 元帝는 六朝 시대 梁나라의 제3대 임금인 蕭繹이다. 그는 西魏가 쳐들어오는데도 ≪老子≫를 강론하고 시를 짓다가 성이 함락되자, 古今의 圖書 14만 권을 불태우며 한탄하기를 “수만 권의 글을 읽었는데도 오히려 이 꼴이 되는 것인가?” 하다가 魏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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