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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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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0
○九年二月 帝與宰相語唐開元天寶政治憂劣할새 因曰 姚崇宋璟 眞名相也 明皇委之不疑 誠爲至當이어늘 而過信國忠林甫하니 深可惜也曰 唐室顚危數矣로되 而人歸唐德者 賴祖宗仁恩厚也니이다
帝曰 陸贄言德宗英睿하야 有獨御寰宇之志라하니 且天下至大어늘 人君何由獨治也리오


22-1-30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1016) 2월에 진종이 재상과 나라 개원연간開元年間천보연간天寶年間 정치의 우열을 말하면서 이르기를, “은 참으로 명재상이다. 명황明皇이 의심 없이 맡긴 것은 참으로 지당한데 를 지나치게 믿은 것은 심히 애석하다.” 하니, 왕단王旦이 아뢰기를, “당나라 왕실이 전복될 위기가 자주 있었으나 사람들이 당나라의 덕에 귀부한 것은 당나라 조종祖宗이 베푼 어진 은혜가 두터웠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진종이 이르기를, “가 ‘덕종德宗은 영명하여 천하를 홀로 다스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큰데 임금이 어떻게 홀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역주
역주1 姚崇 : 650~721. 唐나라 陝州 사람으로 자는 元之이다. 본명은 元崇이었으나 玄宗의 연호를 피해 요숭으로 바꾸었다. 則天武后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이래 中宗, 睿宗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번 재상의 직에 올라 국정을 숙정하고 민생의 안정에 힘썼으며, 716년에 은퇴하였다. 宋璟과 함께 開元의 명재상으로 숭앙되어 ‘姚宋’은 당나라 名相의 대명사가 되었다.
역주2 宋璟 : 663~737. 唐나라 邢州 南和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측천무후 때에 여러 번 左台御史中丞에 임명되었는데, 강직한 관리로서 신임을 받았다. 睿宗 복위 후에 吏部尙書로 있으면서 폐단을 혁파하는 과정에서 太平公主의 미움을 받아 楚州刺史로 좌천되었다. 713년 玄宗이 즉위하자 다시 刑部尙書에 임명되었다. 716년에 姚崇을 이어 재상이 되어 요숭과 함께 開元의 賢相으로 일컬어졌다. 시호는 文貞이다.
역주3 楊國忠 : ?~756. 본명은 釗로 楊貴妃의 從祖兄이다. 天寶 초기에 양귀비가 총애를 받으면서부터 관직이 급상승하였는데, 李林甫와 결탁하여 연달아 큰 옥사를 일으켜서 貴臣들을 축출,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755년에 安祿山이 양국충 토벌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 玄宗을 따라 촉 땅으로 도망갔다가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역주4 李林甫 : 683~753. 唐 玄宗 때 宰相으로 자는 哥奴이고, 호는 月堂이다. 천성이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하였는데 현종 때 이부상서로 있으면서 환관․궁녀들과 결탁하여 현종의 비위만 맞추고 정치를 방자하게 행하다가, 마침내 安祿山의 난을 불러왔다.
역주5 陸贄 : 754~805. 唐나라 蘇州 嘉興 사람으로, 자는 敬輿이고, 시호는 宣이다. 代宗 大曆年間에 진사가 되었고 또 博學宏詞科에 합격했다. 朱泚가 반란을 일으키자 德宗을 따라 봉천으로 피란하였는데, 그때 조서를 起草했다. 뒤에 병부시랑에 임명되고 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가 裴延齡의 참소에 의해 忠州別駕로 폄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정사가 분명했고 奏議에 뛰어나 그가 건의한 글을 모아 놓은 ≪陸宣公奏議≫는 唐 太宗의 ≪貞觀政要≫와 함께 정치가의 必讀書로 꼽혀왔다. 저서에 ≪翰苑集≫이 있다.
역주6 (朝)[旦] : 저본에는 ‘朝’로 되어 있으나, ‘朝’는 朝鮮 太祖 李成桂가 왕위에 오른 뒤 ‘旦’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避諱하여 ‘朝’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글자인 ‘旦’으로 돌려놓았다. 아래도 같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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