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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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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
呂夷簡曰
舜能自擧十六相하고 高宗能自擧傅說하고 唐太宗能自擧魏徵하고 憲宗能自擧裴度하고 周世宗能自擧楊朴하니 此六君功業獨盛하고 名流無窮 無他術也 能自擧賢而用之也
夫欲得英雄之心 瑰奇之士 必在人君天資特達하야 非次擢用이니
若必待輔臣薦擧 左右論列이면 其間有孤寒寡援하고 正直自守하고 無財勢以自結하고 羞諂附以自進者 則終身沈困於下僚하야 雖有忠誠報國之心 經緯致君之道 何由得達乎英主哉
太祖雄才大略으로 長轡遠馭하야 籠絡英傑하고 網羅賢秀하야 求幹濟之才하야 不以資次爲限하고 知人則哲하고 斷自宸衷하야 拔擢皆自於聖君하고 恩澤不歸於私第하니
故人荷帝力하야 捐軀盡節以報君하니 此誠得駕馭之至術也


20-1-10
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은 능히 스스로 16명의 재상을 등용하였고, 고종高宗은 능히 스스로 을 등용하였고, 태종太宗은 능히 스스로 을 등용하였고, 헌종憲宗은 능히 스스로 를 등용하였고, 후주後周 세종世宗은 능히 스스로 을 등용하였으니, 이 여섯 임금의 공업功業이 유독 성대하고 이름이 무궁한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능히 스스로 현자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다.
대저 영웅의 마음을 얻고 뛰어난 인재를 얻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임금의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직급을 뛰어넘어 발탁해서 등용해야 한다.
만약 반드시 보필하는 신하의 천거와 좌우 신하들이 논열論列하기를 기다린다면 그 사이에 고단하고 한미하여 이끌어주는 사람이 적고, 정직하게 자기 지조를 지키며, 재력과 권세로 스스로 결탁하는 일이 없고, 아첨하여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종신토록 하급 관료에 침체되어, 비록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과 국가를 경영하여 자기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 수 있는 방도가 있을지라도 무슨 수로 영명한 임금에게 닿을 수 있겠는가.
태조가 뛰어난 재능과 큰 지략으로 먼 앞날을 내다보고 통치하여 영걸들을 거두어들이고 어진 인재를 망라하여, 큰일을 해낼 인재를 구함에 있어 자급으로 한계를 삼지 않고,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밝아서 자기 마음속에서 결단하여 발탁하는 것이 모두 성군에게서 나오고 은택이 사제私第(고관高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태조의 힘에 감사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절의를 다하여 임금에게 보답하니, 이것이 참으로 신하를 부리는 지극한 방도를 얻은 것이다.”


역주
역주1 呂夷簡 : 979~1044. 중국 北宋의 문신으로, 자는 擔父이다. 1000년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右諫議大夫, 參知政事 등을 역임하다가 1028년 재상에 올라 10여 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였다. 仁宗의 생모인 李宸妃가 죽은 후 眞宗의 비인 章獻太后가 궁인의 예로 장례 지내려 하자 황태후의 예로 행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뒷날의 사달을 미리 막았다. 그러나 인종 초기 郭皇后 때문에 파직당했던 일에 앙심을 품고 환관 閻文應과 주도하여 황후를 폐하였고, 이후 인종이 이를 후회하고 복위시키려 하자 폐후를 살해하였다. 이때 황후 폐위에 반대하는 간관 孔道輔 등을 축출하기도 하였다. 또 范仲淹이 百官圖를 올리면서 여이간이 인사를 사사로이 한다고 지적하자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며 당파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라고 모함하여 饒州로 내쫓았다. 이후 탄핵을 받아 퇴임하였다가 1040년에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 10년 이상 인종을 보좌한 공적이 높이 평가되며, 시호는 文靖이다.
역주2 傅說(부열) : 殷 高宗이 훌륭한 신하를 얻는 꿈을 꾸고 난 뒤에 畫工을 시켜 꿈속에서 본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찾게 하였는데, 傅巖이란 곳에서 제방 쌓는 일을 하고 있던 傅說을 얻은 다음,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아 중흥의 업적을 이룩하였다.(≪書經≫ 〈商書 說命〉)
역주3 魏徵 : 580~643. 唐나라의 魏郡 內黃 사람으로, 자는 玄成이며, 시호는 文貞이다. 高祖의 長子이며 太子인 李建成을 섬겨 洗馬가 되었으나, 뒤에는 형제간의 불화로 말미암아 이건성이 후에 太宗이 되는 李世民에게 살해되자 다시 태종을 섬겼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벼슬은 太子太師에까지 올랐으며, 그가 죽자 태종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탄식하였다. ≪群書治要≫를 主編하였고, 禮書에도 밝아서 ≪小戴禮記≫에 근거하여 ≪類禮≫ 20권을 지었는데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역주4 裴度 : 765~839. 자는 中立이고, 시호는 文忠이다. 唐나라 때의 재상으로, 절도사를 억압하고 환관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취하였다. 憲宗, 穆宗, 敬宗, 文宗의 4朝에 걸쳐 활약하였으며, 晉國公에 봉해졌다. 晩年에 政權을 내놓고는 東都에 綠野堂을 지어놓고 白居易ㆍ劉禹錫 등과 詩酒를 즐겼다.(≪新唐書≫ 권173 〈裴度列傳〉)
역주5 楊朴 : 906~959. 五代 때 後周 世宗의 신하로, 벼슬은 樞密使에 이르렀다. 欽天曆을 짓고 雅樂을 考正하였다.(≪舊五代史≫ 권128 〈王朴列傳〉)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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