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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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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14
○重修玉牒成하야 少傅楊士奇太子少傅楊榮以進한대 上覽之曰 古人重世譜 蓋欲正倫理篤恩義 我國家宗族之盛 皆由祖宗積德所致라하고
又曰 今於朕雖有親疏 然泝所自 實本於一人이니 朕何敢忽이리오하다
士奇等對曰 周自后稷以來 世積忠厚하니 是以子孫衆多하고 維持王業하야 所歷年世最遠하니 國家世德隆厚 故本支繁衍이라
陛下又遠宗帝堯하야 明峻德以親九族이면 將來盛福 當過周家라하니 上頷之曰 然이라하다


35-1-14
중수重修이 완성되어 소부少傅 태자소부太子少傅 이 책을 바쳤는데, 선종이 살펴보고 나서 이르기를, “고인古人세보世譜를 중시한 이유는 대개 윤리倫理를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하고자 해서이니, 우리 국가國家종족宗族이 융성하게 된 것은 모두 조종祖宗께서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짐에게 비록 친소親疏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실로 한 분에게서 근원하는 것이니, 짐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양사기 등이 대답하기를, “나라는 후직后稷으로부터 이후로 대대로 충후忠厚를 쌓았습니다. 이 때문에 자손子孫이 많아지고 왕업王業유지維持하여 지나온 연세年世가 가장 원대하게 된 것이니, 국가國家세덕世德융후隆厚하였기 때문에 본지本支가 번성하였던 것입니다.
폐하陛下께서 또한 멀리 제요帝堯를 종장으로 삼아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친히 하신다면 장래의 왕성한 이 마땅히 나라 종실宗室보다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선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양사기楊士奇양사기楊士奇


역주
역주1 玉牒 : 記載帝王의 譜系와 曆數 및 政令의 연혁을 기재한 書牒을 말한다. 宋代에는 매 10년마다 1번 改修하였다고 한다.
역주2 楊士奇 : 1365~1444. 士奇는 明나라 초기의 대신 楊寓의 자이다. 호는 東里先生이다. 惠帝 建文 초에 천거를 받아 한림에 들어가 ≪太祖實錄≫을 편찬했다. 永樂帝(成祖)가 즉위한 뒤 編修에 임명되고, 내각제도가 정착하자 楊榮과 함께 입각하여 정무에 참여했다. 이후 5대에 걸쳐 내각에 있으면서 輔臣으로 40여 년을 봉직했다. 禮部侍郞 兼 華蓋殿大學士에 올라 兵部尙書를 겸했는데, 청렴하고 유능함으로 천하의 칭송을 들었다. 양영․楊溥와 함께 三楊으로 불렸다. 시호는 文貞이다. 저서에 ≪東里全集≫․≪文淵閣書目≫ 등이 있다.(≪明史≫ 권148 〈楊士奇列傳〉)
역주3 楊榮 : 1371~1440. 明나라 초기의 大臣으로, 자는 勉仁, 초명은 子榮이고, 시호는 文敏이다. 建文 2년(1400) 진사시에 합격하여 翰林院編修에 임명되었다.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文淵閣大學士에 올랐으며, 태종의 北征에 항상 수행하여 중요한 군무를 맡았다. 仁宗 때는 謹身殿大學士, 工部尙書를 지냈고, 宣宗․英宗까지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지모와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楊士奇, 楊溥와 함께 三楊으로 불리며 국가원로로서 정계의 예우를 받았다. 저서에 ≪後北征記≫․≪楊文敏集≫이 있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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