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年冬에 上輦過郞署할새 問郞署長馮唐曰 父家安在오 對曰 趙人이로소이다
上曰 吾居代時에 尙食監高袪數爲我言趙將李齊之賢이 戰於鉅鹿下러니 今吾每飯에 意未嘗不在鉅鹿也로니 父知之乎아 對曰 尙不如廉頗李牧之爲將也니이다
上搏髀曰 嗟乎라 吾獨不得頗牧爲將일새 吾豈憂匈奴哉리오 唐曰 陛下雖得之라도 不能用也시리이다
上曰 公何以知之오 對曰 上古王者之遣將也에 跪而推轂曰 閫以內者는 寡人制之하고 閫以外者는 將軍制之하야 軍功爵賞을 皆决於外하고 歸而奏之하라하니 此非虛言也라
李牧爲趙將에 軍市租를 皆自用하고 饗士賞賜를 不從中覆하야 委任而責成功이라 故牧得盡其智能하야 而趙幾霸라
今臣竊聞魏尙爲雲中守하야 其軍市租를 盡以饗士卒하고 私養錢自饗賓客軍吏舍人하니 是以匈奴遠避하야 不近雲中之塞하고 虜曾一入하니 尙擊之하야 所殺甚衆이라
夫士卒起田中從軍하니 安知尺籍伍符리오 終日力戰하야 斬首捕虜하야 上功幕府라도 一言不相應이어늘 文吏以法繩之하니 其賞不行而法必用이라
且尙坐上功首虜差六級이어늘 陛下下之吏하사 削其爵罰作之라 由此言之컨대 陛下雖得頗牧이라도 弗能用也시리이다
上說하야 是日에 令唐持節赦魏尙하고 復以爲雲中守하고 而拜唐爲車騎都尉하다
7-1-19 14 년(B.C. 166) 겨울에 문제가
연輦을 타고
낭서郎署를 지날 때에
낭서장郎署長 에게 묻기를, “노인장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
조趙 땅 사람입니다.” 하였다.
문제가 말하기를, “내가
대代에 있을 때에
상식감尙食監 고거高袪가 자주 나를 위해서 조나라의 어진 장수
가
거록鉅鹿 아래에서 싸운 것을 말하였다. 지금 내가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뜻이 거록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노인장이
이제李齊를 알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제는 오히려
와
이 장수 노릇 한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문제가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오호라. 내가 염파와 이목을 얻어서 장수를 삼지 못해서일 뿐이니, 〈그들을 얻었다면〉 내가 어찌 흉노匈奴를 근심하겠는가.” 하니, 풍당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그들을 얻었더라도 쓰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문제가 말하기를, “공이 어떻게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왕이 장수를 보낼 때에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면서 말하기를, ‘도성 안은 과인寡人이 통제하고 도성 밖은 장군이 통제하여 군공軍功과 작상爵賞을 모두 밖에서 결정하고 돌아와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으니, 이는 빈말이 아닙니다.
이목이 조나라 장수가 되었을 때에 군대의 시조市租를 모두 직접 사용하도록 하고, 사졸士卒들을 먹이고 상을 줄 때에 조정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에게 위임하여 공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목이 그의 지혜와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어서 조나라가 거의 패자霸者가 되었습니다.
지금 신이 삼가 듣건대
위상魏尙이
운중수雲中守가 되어 그 군의
시조市租를 모두
사졸士卒들을 먹이고,
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빈객賓客과
군리軍吏와
사인舍人을 먹였으니, 이 때문에 흉노가 멀리 피해서 운중의 변방에 가까이 오지 않고, 오랑캐가 한 번 쳐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위상이 그들을 쳐서 죽인 숫자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사졸들은 농사를 짓다가 차출되어 군대에 들어가니 어찌
를 알겠습니까. 종일토록 힘껏 전투하여 적을 베고 포로를 잡아
막부幕府에
공功을 상신해도 한 마디도 호응해주지 않고, 여기에 법을 담당한 관리가 형법으로 다스리니 그 상은 행해지지 않고 형법은 반드시 시행됩니다.
또 위상이 공을 보고할 적에 수급이 6개가 차이가 나는 죄에 걸려 폐하께서 그를 법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내려 그 관작을 박탈하고
이 일로 본다면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더라도 쓰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니,
문제가 기뻐하여 이날에 풍당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위상을 사면하게 하고 다시 운중수가 되게 하고, 풍당을 거기도위車騎都尉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