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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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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4
○九年 彰義軍節度使吳少陽卒하니 其子元濟自稱知軍事하고 縱兵侵掠하야 及東畿어늘 制削其官爵하고 趣諸道兵進討러니
十年 王師討蔡하야 久未有功이라 上遣御史中丞裴度하야 詣行營宣慰하고 察用兵形勢하니 度還奏攻取策하야 與上意合이라 上問諸將才否한대 度對曰 李光顔義而勇하니 當有成功이니이다
知制誥韓愈亦奏言 淮西以三州殘弊困劇之餘 而當天下全力하니 其敗可立而待也 然所未可知者 在陛下斷與不斷耳니이다 不三日 光顔奏破淮西兵於時曲하니 上以度爲知人이라
上悉以兵事委武元衡하니 或說平盧節度使李師道曰 天子所以銳意誅蔡者 元衡贊之也 請密往刺之하라 元衡死 則他相不敢主其事하야 爭勸罷兵矣리라
師道乃謀緩蔡兵하야 伏盜京師하야 刺害元衡하고 又擊裴度하야 傷首不死하고 賊因亡去
議者欲罷度하야 安二鎭反側이어늘 上怒曰 度若罷 是賊計得行이니 朝廷無復綱紀이라 吾倚度 足破賊矣니라 上益信任하야 拜中書侍郞同平章事하다
時方連諸道兵하야 環拏不解하고 內有大恐하니 人累息이러니 及度當國 外內始安이라 由是討賊益急이러니
後討蔡數不利하니 群臣爭請罷兵한대 裴度奏病在腹心하니 不時去 且爲大患이요 不然이면 兩河亦將視此하야 爲逆順이니이다
會唐鄧節度使高霞寓戰敗하니 他相揣上厭兵하고 欲赦賊하야 鉤上指하니 上曰 一勝一負 兵家常勢 若師常利 則古何憚用兵邪 雖累聖이나 亦不應留賊付朕이니 今但論帥臣勇怯 兵強弱 處置何如耳 詎可一敗便沮成計乎
於是獨用度言하니 他言罷兵者稍息이러라


17-1-14
원화元和 9년(814)에 창의군절도사彰義軍節度使 오소양吳少陽이 죽자 그의 아들 가 자칭 지군사知軍事라 하고 군대를 풀어서 침략하여 동기東畿에까지 이르자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제도諸道의 군대를 모집하여 나아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원화 10년에 왕의 군대가 채주蔡州를 토벌하였는데 오랫동안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헌종이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를 보내 행영行營에 가서 선위宣慰하고 용병用兵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배도가 돌아와 공격할 계책을 진달하였는데 헌종의 뜻과 합치되었다. 헌종이 여러 장수들의 재능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하기를, “은 의롭고 용맹하니 의당 공을 이룰 것입니다.” 하였다.
지제고知制誥 또한 아뢰기를, “회서淮西는 3가 쇠잔하고 몹시 곤궁한 상태에서 천하 전체의 힘에 맞서고 있으니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느냐 내리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3일이 못 되어 이광안이 시곡時曲에서 회서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아뢰니, 헌종이 배도가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였다.
헌종이 군대의 일을 모두 무원형武元衡에게 맡기자 어떤 사람이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 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굳은 의지로 채주를 토벌한 것은 무원형이 도왔기 때문이니, 무원형을 몰래 가서 암살하십시오. 무원형이 죽으면 다른 재상들은 그 일을 담당하지 못하여 다투어 파병罷兵하라고 권할 것입니다.” 하니,
이사도가 채주를 토벌하는 군대를 완화시키려고 경사京師에 자객을 침투시켜 무원형을 암살하고, 또 배도를 습격하였다. 〈배도는〉 머리를 다쳤으나 죽지는 않았는데 범인이 이로 인하여 달아났다.
정사를 논하는 자들이 배도를 파직시켜 두 의 반란을 안무按撫하려고 하자 헌종이 노하여 이르기를, “배도가 만약 파직된다면 이는 적도들의 계책이 행해지는 것이니 조정에 다시는 기강이 없게 된다. 내가 배도를 의지하면 세 고을의 적도들을 격파할 수 있다.” 하고, 헌종이 배도를 더욱 신임하여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郎同平章事에 임명하였다.
회채성공淮蔡成功회채성공淮蔡成功
이때에 제도諸道의 군병을 연대하여 혼란한 상황이 풀리지 않고 내부적으로 크게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배도가 국정을 담당하자 안팎이 비로소 안정되고, 이로 인하여 적도의 토벌을 더욱 급하게 하였다.
그 후에 채주를 토벌하는 일이 자주 불리하자 군신들이 앞다투어 파병罷兵하기를 청하자 배도가 아뢰기를, “이 뱃속에 있으니 제때에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하兩河 또한 장차 이것을 보고서 반역할지 순종할지를 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당등절도사唐鄧節度使 가 전투에서 패하자 다른 재상들이 임금이 전쟁에 염증을 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도를 용서하여 임금의 뜻을 시험해보려고 하였다. 헌종이 이르기를,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兵家의 항상 있는 상황이다. 만약 군대가 항상 이긴다면 옛날에 어찌 전쟁하는 것을 꺼렸겠는가. 역대의 임금들 또한 짐에게 역적들을 남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단지 수신帥臣이 용감한지 겁약한지와 병사가 강한지 약한지와 처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할 뿐이다. 어찌 한 번 패했다고 해서 곧 이루어진 계책을 저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배도의 말만을 채용하니 그와 달리 파병罷兵을 말하는 자들이 조금 잠잠해졌다.


역주
역주1 吳元濟 : ?~817. 唐나라 滄州 사람으로, 憲宗 때 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 세력이 洛陽을 위협하자 裴度가 헌종을 도와 토벌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李愬가, 오원제가 할거해 있던 蔡州를 습격하여 오원제를 사로잡았다.(≪舊唐書≫ 권170 〈裴度列傳〉)
역주2 李光顔 : 761~826. 唐나라 河曲部落 사람으로, 자는 光遠이다. 천성이 용맹하여 전공을 많이 세웠다. 德宗 때에 御史大夫ㆍ代州와 洛州의 자사를 지냈고, 憲宗이 蔡州를 토벌할 때에 忠武軍節度使 檢校尙書左僕射에 발탁되었다가 義成節度使로 옮겼다. 穆宗이 즉위하여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고, 敬宗 초에 司徒 河東郡節度使에 제수하였다. 시호는 忠이다.
역주3 韓愈 : 768~824. 唐나라의 문장가로 자는 退之이고, 시호는 文公이다. 宋代에 昌黎伯에 追封되었으므로 韓昌黎라고도 불린다. 792년에 진사가 되어 監察御史ㆍ國子博士 등을 지냈고, 形部侍郞으로 있을 때에 憲宗이 佛骨을 모시는 것을 간하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으며, 이듬해 헌종이 죽자 소환되어 吏部侍郞에 올랐다. 그는 종래의 對句를 중심으로 하는 騈儷文에 반대하고 古文運動을 전개하여 후세 산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유가사상을 존중하고 도교ㆍ불교를 배격하였으며, 특히 堯ㆍ舜에서 孔ㆍ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학문의 전통을 주장하여 송대 性理學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는 ≪昌黎先生集≫이 있다.
역주4 李師道 : ?~819. 唐나라 때 高句麗 사람 李師古의 동생으로, 이사고가 죽가 留後가 되었다. 헌종이 蔡州를 토벌할 때에 蔡州를 지원하였고, 또 武元衡을 살해하고 裴度에게 상해를 입혔다. 部將인 劉悟에게 상해되었다.
역주5 高霞寓 : 772~826. 唐나라 幽州 范陽 사람이다. 어려서 ≪春秋≫와 ≪春秋左氏傳≫과 孫矉과 吳起의 兵書를 탐독하였다. 高崇文을 따라 劉辟을 치는 데 공이 있어 彭州刺史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고숭문을 대신하여 長武城使에 제수되고 感義郡王에 봉해졌다. 憲宗 때 王承宗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振武ㆍ邠寧節度使에 제수되었고, 右金吾衛大將軍에 제수되었는데 도성으로 오다가 奉天에서 죽었다.
역주6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권173 〈裴度列傳〉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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