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歷代君鑑(3)

역대군감(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역대군감(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32-1-52
史臣拜手稽首言曰
上外嚴內仁하고 而雄材大略이요 條理精密하며 知人善任使하야 推誠待下 凡所委用 非浸潤所能間이요 讒諛之人 終見疏斥하고 矜過誤略小罪하야 不以一眚으로 掩衆善하며 不以私愛 蔽大惡이라
聽言之際 明睿所照 不待其盡하야 洞見底蘊하고 臨幾剛果하야 裁制大事하되 數語而決하며 與下人言 開心寫誠하야 表裏明白이라 重刑獄하야 死罪 至四五覆奏하고 隆寒盛暑 必疏囹圄淹滯
用兵善하야 以少擊衆하되 料敵審勢하야 豫爲方略하야 開闔應變 機智如神하며 臨敵對陣 意度閒暇하고 至於決戰 氣勢橫溢하야 率身先赴敵하되 而未甞有所傷이라
自大將으로 至偏裨小校 悉識其能否勇怯하야 臨陣指使 各盡其用하고 而下與士卒 同甘苦하야 士未飮食 不先飮食하고 所獲敵將 悉解其縶하야 置諸左右하야 信任不疑하며 有功者必賞이라
故人皆感悅하야 爭效死力이라 至命將出師 皆指授方略하야 能遵用者 靡不克捷이라 上雖善用兵이나 而以不殺爲主하야 至不得已殺之 必累日弗樂이러라
靖難之師南出 凡得敵兵 皆縱之하고 旣度淮 所至景附하야 入京之日 市不易肆 故不四載 掃除奸兇하야 內平禍難하고 再安宗社
旣爲衆所推戴하야 勤政務하야 早晩臨朝 率漏盡十刻乃罷하고 深知下人艱難하야 凡所役使 撫綏周備
四方上水旱灾傷 必遣人巡視賑卹하고 遇奏邊警及軍機重務 雖夜中이나 必興하야 召群臣定議行之하야 不稽頃刻이라
總覽權綱하야 無專擅之臣하며 愛重名爵軍職하야 必論功하야 一資半級 不輕畀하고 賞功率厚而均이라
遇灾變 必求言하야 雖疏賤이라도 苟有所陳이면 皆得造榻前自達하야 言苟可采 欣然納之하고 否亦不罪
博學好文하야 於禮 雖不泥古 往往默契古人이라 訓諭子孫 以學問爲務하고 數自著書貽之하니 動累萬言이요 反覆明切이라
於祭祀 致誠敬하야 齋戒必愼하고 旦暮必恭하야 謁奉先殿하며 時物 未薦新이면 尙膳者不敢進이라
厚於宗室하야 賚予常過하야 無不及諸弟姪하고 有縱越禮法이면 必訓諭使改하야 不曲爲之隱 曰庶幾保全之也라하다
罪惡著甚如榑如橞 雖免爲庶人이나 其所資一毫 皆歸之하고 飮食衣服之奉 悉如舊하며 嚴肅宮壼하야 不事姑息하다 外戚有過어든 率正以禮法하고 於宦寺 小過必懲이라
與廷臣論事 其侍衛左右者 悉引避하고 鑑前代之失하야 保全功臣하야 推誠待之하고 恒垂訓戒하다
有過 不爲曲隱하야 必明諭之하야 使改하고 不改者 或斥家居하며 或頌繫之하며 或謫立功하야 無幾 卽釋之하고 其能改者 待之加厚하야 未甞宿怨이라 故當時功臣 多奉法云이러라
敬老重賢하며 禮遇儒者하야 萬幾之暇 相與討論治道하야 意甚浹洽하다
愛才惜士하야 有一藝之長이라도 必用之하며 臨軒策士 屢擇其尤者하야 命就文淵閣하야 盡出中秘書하야 俾進學하야 而親飭勵之하고 進士中有才識者어든 不次擢用이라
上性不嗜酒하고 常服澣濯衣하고 雖小物이나 愛惜不妄費하야 戒驕溢하다 却禮官請封禪하되 禮官數因祥瑞致賀 必降勅戒勵하다
晩有疾 鮮御外朝하야 政事 悉付皇太子決之 至軍國重務 必自決하다 左右或勸上少自逸者 曰 祖宗付畀之重하시니 一息不絶 其敢怠爲政 一循太祖舊規하야 申明法制하며 修述禮樂하다
躬謁孔子하야 幸太學하며 廣召天下多聞博雅之士하야 蒐羅古今하야 著爲大典하고 表章正學하야 集四書五經性理大全하야 垂訓萬世하다
德威廣被하야 四裔君長 無間小大遠邇 朝覲貢獻하야 請授官爵於闕下者 無虛日하고
海外若榜葛剌滿剌加忽魯謨斯等處 新受朝命爲王者 殆三十國이요 東踰遼水韃靼女直野人兀良哈之地하야 立行都司衛所하야 設官統治 幾百處
直西部落數百種 皆重譯來附하야 其請置官府者 蓋三之二 西南羌夷 建宣慰宣撫安撫司하야 各軍衛郡縣 視舊增益數倍
安南爲逆이어늘 一擧削平之하야 而郡縣其地하고 獨北虜反覆하야 數爲邊患이어늘 親率六師征之하야 驅諸絶漠之外하니 虜遂不敢南嚮이라
蓋三代以來 若漢之高帝 唐之文皇 宋之太祖 其寬仁大度 聰明文武 閎遠之規 乾剛之用 上皆兼而有之하니 是以 功烈之盛 前古鮮儷焉이러라


32-1-52
사신史臣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아룁니다.
“태종은 밖으로는 엄격하고 안으로는 인자하고, 출중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을 지니고 조리條理가 정밀하며 다른 사람의 선을 알아서 임용하고 성심誠心으로 아랫사람을 대하였다. 모든 임용한 사람은 참소하는 말이 이간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첨하는 사람은 끝내 멀리하고 배척하였으며, 과오를 불쌍히 여기고 작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하나의 허물 때문에 많은 선을 가리지 않고 사적인 사랑 때문에 큰 악을 가리지 않았다.
말을 들을 때에 밝은 지혜로 비춰 보아 말을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꿰뚫어 보았고, 일의 기미를 보고서 과감하게 결단하여 큰일을 재단裁斷하되 몇 마디 말로 결정하였으며, 아랫사람과 말할 때에 마음을 열고서 성심을 드러내어 안팎이 명백하였다. 형옥刑獄을 중시하여 사죄死罪에 대해 4, 5차례 복주覆奏하게 하였고, 추운 겨울과 한여름에는 반드시 감옥에 오래 갇혀서 판결을 받지 못한 죄수를 소결疏決하였다.
용병用兵을 잘하여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파하였는데, 적을 헤아리고 형세를 살펴서 미리 계략을 세워 을 열고 닫고 임기응변하는데 기지機智가 귀신같으며, 적과 마주하고 을 대함에 있어 생각과 기도氣度가 여유가 있었고, 결전決戰함에 이르러서는 기세가 봇물 터지듯 하여 솔선하여 적에게 달려들었으나 일찍이 다친 적이 없었다.
대장大將으로부터 편비偏裨소교小校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능력과 용감하고 겁이 많은 것을 모두 알아서 에 임하여 부릴 때에 각각 그 쓰임새를 극진히 하였고, 아래로 사졸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여 사졸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음식을 먹지 않았다. 붙잡은 적장은 모두 그 결박을 풀어주어 좌우에 두고서 의심 없이 믿어주었고,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여 다투어 사력을 다하였다. 장수에게 명을 내려 출병하게 할 때에는 모두 방략方略을 일러주었는데, 그 방략을 따른 자는 이기지 못한 자가 없었다. 태종이 용병을 잘하기는 하였지만 죽이지 않을 것을 위주로 하여 부득이하여 죽이게 되면 반드시 여러 날 동안 즐거워하지 않았다.
처음에 정난靖難의 군대가 남쪽으로 나올 때에 대개 붙잡은 적병을 모두 놓아주었고, 회수淮水를 건너서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경사京師에 들어온 날에는 시장 사람들이 동요 없이 가게를 그대로 보았다. 그러므로 4년이 못되어 간흉奸凶을 제거하여 안으로 화란을 평정하고 종묘사직을 다시 안정시켰다.
대중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어서는 정무를 부지런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조회에 임해서 대체로 10의 시간을 다 채운 뒤에야 파하였고, 아래 사람의 어려움을 깊이 알아서 사람을 부릴 때에 위무慰撫하기를 극진히 하였다.
사방에서 수재水災한재旱災를 보고하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 가서 살펴보고 진휼하게 하였고, 변방의 경보나 군사軍事 같은 중요한 일을 보고받으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일어나서 군신群臣을 불러서 의정議定하여 행하고 경각을 지체하지 않았다.
나라의 권세를 모두 장악하여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는 신하가 없었고, 관작官爵군직軍職을 아끼고 중시하여 반드시 을 논해서 작은 자급資級이라도 가볍게 주지 않고, 공에 대한 상을 줄 때는 후한 쪽을 따르되 고르게 하였다.
재변災變을 만나면 반드시 구언求言하여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만약 진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탑전榻前에 나아가 직접 진달할 수 있게 하여 그 말이 채납할 만하면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벌을 주지 않았다.
박학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에 대해서 옛날의 예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나 왕왕 옛사람의 도에 계합되었다. 자손에게 훈계할 때에 학문을 하도록 권면하고 자주 스스로 책을 지어서 남겨주었는데, 그 분량이 보통 수만 자였고, 반복해서 명백하고 절실하였다.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재계齋戒를 반드시 삼갔고,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공경히 선전先殿을 배알하였으며, 시물時物천신薦新하기 전에는 상선尙膳이 감히 올리지 못했다.
종실宗室후대厚待하여 하사하는 것이 항상 과도하여 여러 아우와 조카들에게까지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방종하여 예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반드시 훈계하여 고치게 하고 속으로 숨기지 않고서 이르기를, ‘보전해주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죄악이 심하게 드러난 같은 자는 비록 황족에서 강등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지만 그들의 재물을 터럭 하나도 모두 돌려주고 음식과 의복을 모두 예전처럼 하게 하였으며, 후궁을 엄숙히 단속하여 고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외척外戚이 허물이 있으면 예법禮法으로 바로잡았고, 환시宦寺에 대해서는 작은 과실도 반드시 징계하였다.
정신廷臣들과 일을 논할 때에 좌우에서 시위하는 자를 모두 물러나게 하였고, 전대前代의 잘못을 거울삼아 공신功臣보전保全하여 성심으로 대하고 항상 훈계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속으로 숨기지 않고 반드시 분명히 말하여 고치게 하고, 고치지 않은 자는 내쳐서 집에 있게 하기도 하고, 옥에 가두기도 하고, 꾸짖어서 공을 세우게 하기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석방하였고, 능히 고친 자는 대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여 마음속에 원망을 담아둔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공신들이 대부분 법을 지켰다.
노인을 공경하고 현자를 존중하며 유자儒者를 예우하여 정무를 보고 난 여가에 그들과 치도治道를 토론할 때에 뜻이 매우 잘 맞았다.
인재와 선비를 아껴서 한 가지의 재능만 있어도 반드시 기용하였으며, 시장試場에 임어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여 그중에 우수한 자를 자주 뽑아서 문연각文淵閣에 나아가게 하고, 모두 에 나가서 진학進學하게 하고 직접 면려하였고, 진사進士 중에 재능과 학식이 있는 자가 있으면 자급을 무시하고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태종은 성격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세탁한 옷을 입었으며,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아껴서 함부로 쓰지 않고 교만함을 경계하였다. 예관禮官봉선封禪하기를 청한 말을 물리쳤고, 예관이 자주 상서祥瑞로 인하여 경하를 올리려고 하면 반드시 칙서를 내려 경계시켰다.
만년에 병이 있자 외조外朝에 드물게 임어하고 정사를 모두 황태자에게 맡겨서 결재하게 하였으나,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반드시 스스로 결재하였다. 좌우 신하 중에 혹 조금 편히 지내시라고 권하는 자가 있으면 이르기를, ‘조종祖宗이 맡기신 중대한 일이니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감히 정사에 태만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결같이 태조의 옛 법을 따라서 법제를 거듭 밝히고 예악禮樂을 지키고 계승하였다.
몸소 공자孔子참알參謁하기 위해 태학太學에 갔고, 천하의 박식하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를 널리 불러 고금의 서적을 수집하여 ≪대전大典≫을 만들었고, 정학正學표장表章하여 ≪사서대전四書大全≫과 ≪오경대전五經大全≫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휘집彙集하여 만세萬世에 교훈을 남겼다.
덕과 위엄이 널리 입혀져서 사방 변방의 군장君長들이 크고 작고 멀고 가깝고를 막론하고 조회 와서 공물을 바치고 대궐에서 관작官爵을 받기를 청하는 자가 없는 날이 없었다.
해외海外 등 지역에 새로 조명朝命을 받아 왕이 된 자가 거의 30개 나라이고,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넘어 의 땅에 를 세우고 관원을 두어 통치한 곳이 수백 곳이고,
서쪽의 부락部落 수백 종족이 모두 몇 번의 통역을 거쳐 와서 귀부歸附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해주기를 청하는 곳이 3분의 2이고, 서남쪽의 강이羌夷선위사宣慰司선무사宣撫司안무사安撫司를 설치하고 각 군현郡縣이 옛날에 비해 늘어난 것이 몇 배나 되었다.
이 반역을 하자 일거에 평정하여 그 땅에 군현郡縣을 설치하였고, 특히 북로北虜반복反覆해서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자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정벌하여 사막 밖으로 몰아내니 북로北虜가 마침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삼대三代 이래로 나라 고제高帝나라 문황文皇나라 태조太祖의 관대하고 어진 큰 도량과 총명하고 문부를 겸한 능력과 원대한 규모와 강건剛健한 결단력을 태종이 모두 겸하여 갖추고 있었으니, 이 때문에 공렬功烈의 성대함이 전대의 제왕 중에 짝할 사람이 적었다.”


역주
역주1 朱榑 : ?∼1428. 明나라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洪武 3년(1370)에 齊王에 봉해졌다. 建文 초에 모반한다고 고발되어 황족의 신분이 박탈되어 庶人이 되었다가 永樂 초에 復爵되었는데, 곧이어 교만한 짓을 하고 반역할 뜻을 품었다가 京邸에 연금되었다. 宣德 3년(1428)에 樓濂이라는 사람이 자칭 小齊王이라고 하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고, 이때 주부와 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역주2 朱橞 : ?∼1417. 明나라 태조의 열아홉째 아들로, 洪武 24년(1391)에 谷王에 봉해졌다. 燕王이 起兵했을 때에 京師로 돌아와 金川門을 열고 맞이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여 長沙王으로 改封되었는데 功을 믿고서 교만을 부렸고 틈을 보아 반란을 일으키려다 廢庶人이 되었는데 스스로 焚死하였다.
역주3 中秘書 :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는 기구이다.
역주4 榜葛剌 : 漢나라 때 身毒國으로, 東漢 때에 天竺이라고 하였다. 그 후 中天竺이 梁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南天竺이 魏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唐나라 때에 다섯 개의 천축으로 나누고 또 이름을 五印度라고 하였다. 宋나라 때에는 천축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썼는데 榜葛剌는 東印度이다. 永樂 6년(1408)에 그 왕 靄牙思丁이 사신을 보내서 入朝하였다.(≪明史≫ 권326 〈外國7〉)
역주5 滿剌加 : 말레이시아 반도 서남쪽에 있는 말라카 해협에 있는 나라이다. 占城 남쪽에 있는데, 순풍을 만나면 배로 龍牙門까지 8일이 걸리고, 용아문에서 다서 서쪽으로 2일을 가면 도달한다. 永樂 元年(1403)에 中官 尹慶을 그곳에 보냈는데 그때는 그 땅에 왕도 없었고 나라로 불리지도 않았다. 영락 3년에 그곳의 酋長 拜里迷蘇剌을 滿剌加國王으로 봉하였고, 영락 9년에 滿剌加國의 왕이 그 처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입조하였다.(≪明史≫ 권325 〈外國6〉)
역주6 忽魯謨斯 : 서남아시아의 페르시아만과 오만만 사이에 있던 호르무즈 왕국을 가리킨다. 永樂 10년(1412)에 鄭和가 명을 받아 사신을 갔고, 영락 12년에 그 나라의 사신이 경사에 이르렀으며, 이후 정화가 다시 사신을 간 뒤에 사행이 끊겼다가 宣德 5년(1430)에 정화가 다시 사신을 다녀온 뒤로 왕래가 끊겼다.(≪明史≫ 권326 〈外國7〉)
역주7 韃靼 : 蒙古를 가리키는 말로,元나라의 후예이다. 원래는 突厥의 통치하에 있던 하나의 部落이었는데 돌궐이 망한 뒤에 달단이 점점 강대한 부락이 되었고, 宋․遼․金 시대에는 漠北의 蒙古部 黑韃靼이라고 하고, 漠南의 汪古部를 白韃靼이라고 하였다. 몽고가 흥기해서는 달단이 몽고에게 멸망하였는데, 몽고를 그대로 달단이라고 불렀다. 원나라가 망하자 그 종족이 막북으로 달아났고, 명나라 때에는 또 東部 몽고의 成吉思汗의 후예 각 部를 달단이라고 하였다.(≪明史≫ 권327 〈外國8〉)
역주8 女直野人 : 女眞과 같다. 周나라 때에는 肅慎氏라고 불렀고, 漢․三國․晉에서는 挹婁라고 하였고,南北朝 때에는 勿吉이라고 하였고, 隋․唐 때에는 黑水靺鞨이라고 하였고,五代 때에 비로소 女真이라고 하였다. 後에 遼에 속하였는데, 遼의 임금 耶律宗真의 이름을 諱하여 女直으로 개칭하였다.
역주9 兀良哈 : 두만강과 압록강 북쪽의 建州衛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여진족을 말한다. 兀良介로도 표기하며, 烏梁海라고도 부른다.
역주10 行都司衛所 : 都司衛所는 明代의 地方 军事機構인데 府․州․縣이 설치되지 않은 곳은 그 지역의 民事를 겸하여 다스렸다. 行都司衛所는 明代에 나타나는데, 도사위소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 설치하여 도사위소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太宗 때에 遼水 너머 여러 곳 및 野人과 烏梁海의 땅에 행도사위소를 설치하여 관리를 두어 300여 곳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고, 宣宗 宣德 10년(1435)에 陝西行都司衛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憲宗 12년(1476)에 鄖陽府에 行都司衛所가 설치되어 流民을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弇山堂别集≫ 권1 〈盛事述1 成祖功徳〉, ≪明㑹典≫ 권27 〈户部十二 經費 諸司職掌〉, ≪明史≫ 권14 〈憲宗本紀〉)
역주11 軍衛 : 明나라 때 군대의 編制 명칭이다. 京衛, 南京衛가 있다. 京衛 내에는 錦衣衛,旗手衛,金吾前衛,金吾後衛,羽林左衛 등 26개의 衛가 있었고, 南京衛 내에는 留守左衛,鎭南衛,水軍左衛 등 49개의 衛가 있었다. 淸나라 때에도 명나라의 衛 제도를 沿用하여 요충지에 衛를 설치하였는데, 대체로 5,600명이 1衛가 되고, 五軍都督府에 예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주둔하는 지역의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威海衛․金山衛 등으로 명칭하였다.(≪明史≫ 권76 〈職官5〉)
역주12 安南 : 옛 交阯 땅으로 현재의 越南이다. 唐나라 이전에는 모두 中國에 속해 있었고, 五代 때 土人 曲承美가 점거하였으며, 宋나라 초에 丁部領을 交阯郡王으로 봉하였다. 洪武 원년(1368)에 안남왕 陳日煃가 표문을 올려 입조하였는데, 그 후 國相 黎季犛가 권력을 잡고 왕을 시해한 다음 명령을 받지 않자, 永樂 4년(1406) 勳臣 張輔와 沐晟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이때 노인들은 “안남은 본래 중국 땅이니 內地로 귀속시켜 달라.”고 하자 그들의 말을 따라 군현을 설치하여 안남의 이름을 교지로 고친 다음 三司를 설치하고 都督僉事 呂毅로 都司事를 삼아 총독하게 했었는데, 그 후 다시 반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明史≫ 권321 〈外國2〉)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