霍光旣薨
에 始親政事
하야 厲精爲治
하야 五日一聽事
하고 自丞相以下
로 各奉職
事
하야 敷奏其言
하고 考試功能
이라
侍中尙書功勞當遷及有異善이면 厚加賞賜하야 至于子孫히 終不改易이라
樞機周密하고 品式備具하야 上下相安하야 莫有苟且之意러라
及拜刺史守相에 輒親見問하야 觀其所由하며 退而考察所行하야 以質其言하야 有名實不相應이면 必知其所以然이라
常稱曰 庶民所以安其田里而亡愁歎怨恨之心者는 政平訟理也라 與我共此者는 其唯良二千石乎인저
以爲太守는 吏民之本이니 數變易則下不安하고 民知其將久라야 不可欺罔하야 乃服從其敎化라
故二千石有治理效
어든 輒以璽書勉勵
하고 增秩賜金
하고 或爵至關內侯
라가 公卿缺
이면 則選諸所表
하야 以次用之
하니 是以漢世良吏於是爲盛
이라 稱中
焉
이러라
9-2-16 선제는 여염에서 성장하여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민간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곽광이 죽고 나서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였는데, 5일에 한 번씩 정사를 듣고 승상丞相으로부터 이하 관원들이 각각 자기가 맡은 일을 아뢰되 구두로 진달하게 하고 그 공로를 확인하였다.
시중侍中과 상서尙書로서 공로가 있어 진급시켜야 하거나 남다른 선행이 있으면 후하게 상을 내려 자손에까지 이르도록 고치지 않았다.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주밀하고 법률이 완비되어 상하上下가 모두 편안하여 구차한 뜻이 없었다.
자사刺史와
을 임명할 때에는 매번 직접 보고 물어서 그 말한 동기를 살피며, 그들이 물러가면 행하는 것을 고찰하여 그 말과 대조해서
명실名實이 상응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을 알았다.
褒裝守令
항상 말하기를, “서민이 그 전리田里에서 편안히 살고 근심과 원한의 마음을 잊는 것은 정치가 공평하게 되고 송사가 사리에 맞게 처리되기 때문이다. 나와 이것을 함께하는 자는 오직 어진 이천석二千石일 것이다.” 하였다.
태수太守는 이민吏民의 근본이니 자주 바뀌면 아래에서 불안하게 여기고,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아야 속이지 않아서 그 교화에 복종한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천석이 다스린 공효가 있으면 조서詔書를 내려 면려하고 질秩을 올려주고 금金을 하사하고, 혹은 작爵이 관내후關內侯에 이르렀다가 공경公卿에 결원이 생기면 표창했던 사람들에서 뽑아서 차례로 임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한나라 때에 양리良吏가 이때에 가장 많아서 중흥中興이라고 일컬어졌다.
선제의 재위 기간은 25년이었고, 향년은 4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