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初屯樊에 劉琮이 擧州降操而不以告한대 帝久乃覺則操已在宛矣라
帝乃大驚한대 或勸帝攻琮이면 荊州可得이라하니 帝曰 劉荊州臨亡에 託我以孤遺하니 背信自濟면 死何面目으로 以見劉荊州乎아
將其衆去하야 過襄陽에 呼琮하니 琮懼不能起어늘 琮左右及荊州人이 多歸帝라
帝過辭表墓에 涕泣而去하야 比到當陽하니 衆十餘萬人이요 輜重數千兩이라
日行十餘里하고 別遣關羽하야 乘船會江陵한대 或謂帝宜速行保江陵이어늘 今擁大衆에 被甲者少하니 曹公兵至면 何以拒之오
帝曰 夫濟大事엔 必以人爲本이니 今人歸吾어늘 吾何忍棄去리오하더라
12-1-3 소열제가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을 때 유종劉琮이 형주荊州 땅을 바치고 조조曹操에게 항복하면서 알리지 않았는데, 소열제가 한참 뒤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조가 이미 완宛 땅에 있었다.
소열제가 이에 크게 놀라자 어떤 사람이 소열제에게 권하기를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소열제가 이르기를, “유형주劉荊州(유표劉表)가 죽을 때에 나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였으니,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나의 과업만을 이룬다면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열제가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 양양襄陽을 지나가려 할 때 유종을 부르니, 유종은 두려워 일어나지 못했는데 유종의 좌우 측근 및 형주 사람들이 소열제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소열제가 유표의 묘소를 지날 적에 눈물을 흘리고 떠나가서 당양當陽에 도착하니 무리가 10여만 명이었고 치중輜重이 수천 대였다.
하루에 십여 리를 가고, 따로 관우關羽를 보내어 배를 타고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소열제에게 이르기를, “신속히 가서 강릉을 지켜야 하는데, 지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 가운데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조조의 군대가 닥쳐오면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소열제가 이르기를, “큰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였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