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年冬十月에 帝幸辟雍하사 初行養老禮할새 以李躬爲三老하고 桓榮爲五更한대 三老服都紵大袍하고 冠進賢하고 扶玉杖하니 五更亦如之호되 不杖이라
乘輿가 到辟雍禮殿하사 御坐東廂하시고 遣使者하야 安車로 迎三老五更於太學講堂한대 天子가 迎於門屛하사 交禮호되 道自阼階하고
三老가 升自賓階하야 至階에 天子가 揖如禮하고 三老가 升東面에 三公이 設几하고 九卿이 正履하고
天子가 親袒割牲하고 執醬而饋하고 執爵而酳한대 祝哽在前하고 祝饐在後하며 五更南面이어든 三公이 進供호되 禮亦如之하고
禮畢에 引桓榮及弟子하야 升堂한대 帝自爲下說에 諸儒가 問難於前하니 冠帶縉紳之士가 圜橋門而觀聽者 蓋億萬計라
於是에 詔賜榮爵關內侯하고 三老五更은 皆以二千石祿으로 養終厥身하고 賜天下三老酒肉하다
帝自爲太子로 受尙書於桓榮이러니 及卽帝位에 猶尊榮以師禮라 常幸太常府하야 令榮으로 坐東面하고 設几杖하고 會百官及榮門生數百人하야 帝親自執業하시고
諸生이 或避位發難하니 帝謙曰 太師가 在是라하고 旣罷에 悉以大官供具로 賜太常家라
榮이 每疾病에 帝輒遣使存問하사 大官太醫가 相望於道러니 及篤에 上疏謝恩하고 讓還爵土하니 帝幸其家하사 問起居호되 入街下車하사 擁經而前하사 撫榮垂涕하고 賜以牀茵帷帳衣被刀劒하고
榮이 卒에 帝親自變服하고 臨喪送葬하고 賜冢塋于首陽之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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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永平 2년(59) 겨울 10월에 명제가
벽옹辟雍(
태학太學)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할 때
이궁李躬을
으로 삼았는데, 삼로는
도저대포都紵大袍를 입고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옥장玉杖을 짚었으며, 오경 역시 그와 같은 복장이었으나 지팡이는 짚지 않았다.
황제의 수레가 벽옹의 예전禮殿에 도착하여 동상東廂에 어좌御坐를 마련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안거安車로 삼로와 오경을 태학의 강당에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천자가 문병門屛에서 맞이하여 서로 예를 표하되 인도하여 조계阼階(동계東階)로 올랐다.
삼로가 빈계賓階(서계西階)로 올라 계단 아래에 이르렀을 때에 천자가 예를 갖추어 읍揖하였고, 삼로가 예전禮殿에 올라가 동향하였을 때 삼공三公이 궤안几案을 설치하고 구경九卿이 신을 정돈하였다.
천자가 직접 소매를 걷어 올려 희생을 가르고
장醬을 잡아 대접하고
작爵을 잡아 입을 가셨는데,
오경이 남향하면 삼공이 나아가 음식을 올리되 그 예도 이와 같이 하였다.
예를 마치고 환영과 제자들을 인도하여 당 위로 올랐는데, 명제가 스스로 아랫사람들을 위해 강설할 때 여러 유자들이 명제의 앞에서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였으니,
을 둘러싸고 구경하던
관대冠帶를 갖춘 벼슬아치와 사대부들이 대체로 억만이나 되었다.
臨雍拜老
이에 조서를 내려 환영에게 관작을 내려
관내후關內侯로 삼게 하고 삼로와 오경에게는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봉록을 내려 종신토록 그 몸을 봉양하게 하였으며
에게는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명제는 태자가 되었을 때부터 환영에게 ≪상서尙書≫를 배웠고 황제에 즉위했을 때에도 오히려 환영을 스승의 예禮로 존중하였다. 항상 태상부太常府에 행차하여 환영을 동면東面에 앉게 하고 궤장几杖을 배설하게 한 다음 백관百官 및 환영의 문하생 수백 명을 모이게 하여 명제가 친히 수업受業하였다.
그리고 제생諸生이 혹 자리를 비켜서 명제에게 어려운 것을 질문하였는데, 명제는 겸손하게 말하기를 “태사太師께서 이 자리에 있다.”라 하였고, 강석講席이 파하면 태관太官이 마련한 음식을 모두 태상太常의 집에 하사하였다.
환영이 병을 앓을 때마다 명제는 사자使者를 보내 위문하여 태관太官과 태의太醫가 끊임없이 길을 오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병이 위독해졌을 때 〈환영이〉 상소上疏하여 사은謝恩하고 작위爵位와 전토田土를 사양하여 돌려주니, 명제가 그의 집에 행차하여 안부를 묻되 골목에 들어가서는 수레에서 내려 경서를 안고 앞으로 가서 환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린 다음 상인牀茵, 유장帷帳, 의피衣被, 도검刀劒을 하사하셨다.
그리고 환영이 죽었을 때는 명제가 친히 변복變服하고 상喪에 임하여 장사 지낸 다음 수양산首陽山에 총영冢塋을 설치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