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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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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北漢主聞太祖晏駕하고 甚喜하야 謀大擧入寇하야 遣使請兵于契丹한대 二月 契丹遣其武定節度使政事令楊衮하야 將萬餘騎하야 如晉陽하다
世宗聞之하고 欲自將兵以禦하니 群臣皆曰 劉崇自平陽遁走以來 勢蹙氣沮하야 必不敢自來하리니 陛下新卽位하야 山陵有日하니 人心易搖 不宜輕動이니 宜命將禦之라한대
世宗曰 崇幸我大喪하고 輕朕年少新立하야 有呑天下之心하니 此必自來하리니 朕不可不往이라
馮道固爭之하니 世宗曰 昔唐太宗定天下 未甞不自行하니 朕何敢偸安이리오 命馮道奉梓宮赴山陵하고 以鄭仁誨爲東京留守하고 遂發大梁하야 至懷州하다
世宗欲兼行速進한대 控鶴都指揮使趙晁私謂通事舍人鄭好謙曰 賊勢方盛하니 宜持重以挫之
好謙以聞하니 世宗怒曰 汝安得此言 必爲人所使 言其人則生하고 不然必死하리라 好謙以實對한대 命幷晁械于獄하다
張元徽擊周右軍하야 合戰未幾 樊愛能何徽引騎兵先遁하니 右軍潰 步兵千餘人解甲呼萬歲降于北漢하니 世宗見軍勢危하고 自引親兵하야 犯矢石督戰이라
北漢主知世宗自臨陣하고 褒賞張元徽하야 趣使乘勝進兵하니 元徽前略陳이라가 馬倒 爲周兵所殺하니 元徽 北漢之驍將也 北軍由是奪氣러라
時南風益盛하니 周兵爭奮이라 北漢兵大敗하니라
世宗欲誅樊愛能等以肅軍政호되 猶豫未决하야 乃晝臥帳中이러니
張永德侍側이라 世宗以其事訪之한대 對曰 愛能等素無大功하고 忝冐節鉞하야 望風先逃하니 死未塞責이라 且陛下方欲削平四海하시니 苟軍法不立이면 雖有熊羆之士百萬之衆이나 安得而用之리오
世宗擲枕於地하고 大呼稱善하고 卽收愛能徽及所部軍使以上七十餘人하야 責之曰 汝曹皆累朝宿將이라 非不能戰이어늘 今望風奔遁者 無他 正欲以朕爲奇貨하야 賣與劉崇耳이라하고 悉斬之하다
初以何徽先守晉州有功이라하야 欲免之러니 旣而以法不可廢라하야 遂幷誅之하고 而給槥車歸塟하니 自是驕將惰卒 始知所懼하야 不行姑息之政矣러라


19-1-2
북한주北漢主태조太祖의 죽음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크게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려고 도모하여 사신을 거란契丹에 보내 원병援兵을 청하였는데, 2월에 거란이 그들의 무정절도사武定節度使 정사령政事令 양곤楊衮을 보내 기병騎兵 1만여 를 거느리고 진양晉陽으로 가게 하였다.
세종이 그 소식을 듣고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려고 하니,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평양平陽에서 달아난 이후로 세력이 위축되고 기가 꺾였으니 결코 감히 직접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막 즉위하여 장례를 치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동요하기 쉽습니다.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되니 장수에게 명하여 막게 해야 합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유숭이 우리가 대상大喪을 당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짐이 어린 나이로 새로 등극한 것을 경시해서 천하를 삼킬 마음을 둔 것이니, 반드시 직접 올 것이다.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가 굳세게 간쟁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옛날에 태종太宗이 천하를 평정할 때에 직접 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짐이 어찌 감히 안일安逸을 도모하겠는가.” 하고, 풍도에게 명하여 선제先帝영구靈柩을 모시고 산릉山陵으로 가게 하고,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삼고는 마침내 대량大梁을 출발하여 회주懷州에 도착하였다.
세종이 두 배의 속도로 빨리 진격하려고 하니, 공학도지휘사控鶴都指揮使 통사사인通事舍人 정호겸鄭好謙에게 사적으로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한창 강성하니 신중하게 행동하여 적을 꺾어야 한다.” 하였다.
정호겸이 세종에게 아뢰자 세종이 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필시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을 것이니, 그 사람을 말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정호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조조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후주後周우군右軍을 쳐서 맞붙어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하휘何徽가 기병을 이끌고 먼저 달아나니 우군이 무너졌다. 보병 1천여 명이 갑옷을 벗고 만세를 부르고 북한北漢에 항복하니, 세종이 군세軍勢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는 스스로 친병親兵을 이끌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독전督戰하였다.
북한주가 세종이 직접 전진戰陣에 나온 것을 보고 장원휘를 포상하고 승전한 여세를 타서 진격하라고 재촉하니 장원휘가 앞으로 나아가 진을 순시하다가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서 후주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장원휘는 북한의 효장驍將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이로 인하여 기세를 빼앗겼다.
이때 남풍이 더욱 세차게 불자 후주 병사들이 다투어 분전奮戰하니 북한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세종이 번애능 등을 주살하여 군정軍政을 엄숙하게 하고 싶었으나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고 낮에 장막 안에 누워 있었다.
장영덕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그 일을 가지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번애능 등은 평소 큰 공이 없었고 장수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적의 기세를 보고서 먼저 달아났으니 죽어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지금 사해四海를 평정하려고 하시니 만약 군법軍法이 확립되지 않으면 용맹한 군사 백만 명이 있더라도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종이 베개를 바닥에 던지면서 큰소리로 칭찬하고 즉시 번애능과 하휘 및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軍使 이상 70여 명을 잡아들여 꾸짖기를, “너희들은 모두 여러 왕조를 거친 오래된 장수들이다. 싸울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지금 적의 기세만 보고서 달아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짐을 기화奇貨로 여겨 에게 팔아넘기려고 한 것이다.” 하고, 모두 참수하였다.
처음에 하휘는 먼저 진주晉州를 지킨 공이 있다고 하여 죄를 면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군법은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함께 참수하고 관을 싣는 수레를 주어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하였다. 이때부터 교만했던 장수와 나태했던 사졸들이 비로소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직무를 고식적으로 행하지 않았다.


역주
역주1 劉崇 : 五代 北漢의 태조 劉知遠의 아들인 劉旻의 初名이다.(≪治平要覽≫ 권102 〈後周〉)
역주2 馮道 : 五代 때 瀛洲 景城 사람으로, 자는 可道이다. 처음 劉守光을 섬겨 參軍이 되었다가 유수광이 패하자 張承業을 섬겼는데, 장승업이 晉王에게 천거하여 河東節度使가 되었다. 뒤이어 後唐의 莊宗, 明宗, 愍帝, 廢帝를 섬기며 정승을 지냈고, 後晉의 高祖가 후당을 멸망시키자 고조를 섬겨 燕國公에 봉해졌다. 고조가 임종을 앞두고 아들 石重睿를 부탁하였으나 풍도는 景延廣과 상의하여 石重貴를 황제로 세웠으니, 그가 出帝이다. 후진이 망한 뒤 한때 契丹을 섬기다가 後漢의 고조가 즉위하자 돌아와 고조를 섬기고, 後周의 태조가 후한을 멸망시키자 태조를 섬겼다.
역주3 鄭仁誨 : ?~955. 五代 때 後周 晉陽 사람으로, 자는 日新이다. 인품이 단정하고 후중하며 겸손하여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벼슬은 侍中에 이르렀다.(≪舊五代史≫ 권123 〈周書〉)
역주4 趙晁 : 909~960. 宋나라 眞定 사람이다. 後周에 벼슬하여 河陽三道節度使, 孟懷等州觀察措置等使를 지냈다. 宋나라 초에 檢校太尉가 되었는데, 병으로 京師에 돌아와 죽었다.
역주5 張元徽 : ?~954. 五代 때 邢州 武安 사람이다. 後晉 出帝 때 거란을 격파하여 代州刺史가 되었고, 北漢 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가 武寧軍節度使가 되었는데, 後周의 군대에게 살해되었다.
역주6 樊愛能 : 五代 때 後周의 장수이다.
역주7 劉崇 : 五代 때 徐州 蕭縣 사람이다. 朱溫微가 일찍이 그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後梁을 건국하고 나서 유숭을 불러 등용하였다. 殿中監, 商州刺史를 역임하였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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