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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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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18
○二月 江西行省 以陳友諒鏤金床進한대 上觀之하고 謂侍臣曰 此與孟昶七寶溺器何異리오 以一床으로 工巧若此하니 其餘可知 陳氏父子窮奢極靡하니 焉得不亡이리오하고 卽命毁之하다
侍臣曰 未富而驕하고 未貴而侈하니 此所以取敗라하니 上曰 旣富라도 豈可驕乎 旣貴라도 豈可侈乎리오 有驕侈之心이면 雖富貴라도 豈能保乎리오
處富貴者 正當抑奢侈하고 弘儉約하며 戒嗜欲하야 以厭衆心이라도 猶恐不足以慰民望이어든 況窮天下之技巧하야 以爲一己之奉乎 其致亡也宜矣
然此亦足以示戒 覆車之轍 不可蹈也라하다


29-1-18
2월에 강서행성江西行省에서 으로 아로새긴 진상進上하였는데, 태조가 살펴보고 시종신侍從臣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칠보七寶로 변기를 장식했던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일개 이 이처럼 공교工巧하니 나머지 것들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진씨陳氏 부자父子의 사치가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하고, 바로 부숴버리라고 명하였다.
시종신이 말하기를, “부유하지 않으면서 교만하고 귀하지 않으면서 사치하였으니, 이것이 스스로 패망을 초래했던 까닭입니다.”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이미 부유하게 되었더라도 어찌 교만하겠으며, 이미 귀하게 되었더라도 어찌 사치할 수 있겠는가. 교만하고 사치스런 마음이 있으면 비록 부귀해졌더라도 어찌 그 부귀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부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실로 사치奢侈에 대한 마음을 억제하고 검약儉約에 대한 마음을 키우며 기욕嗜欲에 대한 마음을 경계하여 대중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오히려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운데, 더구나 천하의 기교技巧를 다하여 일신을 봉양하는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패망을 초래했던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또한 경계를 보일 만한 일이니, 다시 전철을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陳友諒 : 1316~1363. 元나라 末期 群雄의 한 사람이다. 호북성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徐壽輝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倪文俊의 서기가 되었다. 1357년 예문준을 죽이고 그 병력을 모은 다음, 揚子江을 따라 내려가 안휘성 남부에 기반을 굳혔다. 1359년에는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국호를 大漢이라 했다. 江州에 도읍하고 한때 江西와 호남, 호북을 점거하였으나 1363년 주원장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역주2 孟昶 : 919~965. 五代 때 後蜀의 제2대 임금으로, 자는 保元, 초명은 仁贊이다. 재위 기간에 후촉이 멸망하여 황제로서의 시호와 묘호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後主’라고 불린다. 재위 기간에 ‘廣政’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즉위한 뒤에 권신들을 제거하고 정치를 개혁하였는데, 농업을 장려하고 과거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하여 즉위 초기에 후촉은 문화가 발달하고 세력이 강성하였다. 하지만 집권 후기에는 七寶로 변기를 장식할 정도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세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宋나라 太祖 乾德 3년(965) 송나라에 항복하고, 포로로 京師로 끌려와 檢校太師 兼中書令에 임명되고 秦國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恭孝이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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