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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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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58
史臣 拜手稽首言曰
上天禀純明하고 孝友之行 出於至性하니 太宗文皇帝仁孝文皇后 深所鍾愛 初在東宮 備悉民情하고 旣卽位 悉行所志하니 每詔書下 軍民歡抃 如旱得雨하고 如飢渴得飮食이라
遇水旱이면 必齋戒致禱하고 郡縣上言飢荒이면 卽遣人賑恤寬貸하며 急民之急 恒若不及하고 臨政務當大體하야 未嘗計利하니 恒曰 能推利以厚百姓이면 國家將享大利焉이라하더라
明於知人하야 在廷之臣其才行文學高下 瞭然於心하고 緩急用之 靡不曲當하니 寸長可用이면 咸所不棄하고 苟犯名義 雖才必黜하야 未嘗以所愛惡 移是非之公이라
於用將帥 取長棄短하고 嚴謹備邊하야 不忘遠略하니 邊將陛辭 每諭之曰 民力罷矣 愼勿貪功生事하라 夷虜至塞下 順則撫之하고 逆則禦之驅之而已 毋爲首禍하야 違命獲功하라 吾所不賞이니라하다
賞功褒德 寧過於厚하고 惡贓吏하야 屢戒法司曰 贓吏 務厲民裕己하니 國家恤民 必自去贓吏始 故未嘗貸之라하다
重學校嚴薦擧하야 每諭所司 用人必求實材하고 授官必責實效
樂聞直言하야 所言切理 多見褒答하고 間有咈逆이면 雖暫齟齬 無幾輒悟하고 更加賜賚하며 喜怒或小過 未嘗不悔하고 旣悔 改之不吝이라
雅志儒術하고 務學問하야 諸經皆通하고 於書尤熟하니 嘗曰 爲治不本此書 雖獲小康이나 苟焉而已라하고 於春秋하얀 歎曰 先王之禮壞하니 此書所由作也라하다
卜筮不用俗占法하고 必取正周易한대 反覆卦爻彖象之辭及程朱氏之說하야 信之甚篤하고 喜考古制度하야 以求聖人之意
贊善陳濟 博洽冠一時하야 數侍論議한대 退語其僚曰 殿下天資明睿하니 非群臣所及이라하다
學問所得 必見諸行事하고 爲文章 不事雕飾하야 達意而止러라 贊善王汝玉嘗言作詩有法한대 上曰 三百篇何所法哉리오하다
無他嗜好하고 惟畜經籍法書甚富하야 閒暇에도 手不釋卷이라 被服寬博하야 類儒者러라
少侍太祖하야 曉識天象이러니 長益探究하야 或欽天監所陳有諱避者 輒見窮詰이라 旣卽位 作臺禁中하고 時自觀察而預言休咎之應하야 多奇中이러니 遇灾變 必警飭이라
自奉儉薄하야 恒念祖宗創業之勤하야 每事 必問祖法如何하고 又曰 循祖宗之法者 當明祖宗之心이라하다
嘗集侍臣하야 錄太祖親製皇陵碑文하고 授諸子俾熟讀曰 知此 庶幾知保富貴라하다
又嘗命刊眞德秀大學衍義賜諸子曰 爲人上 不可不知此書 爲人臣 不可不知此書라하다
在儲位二十年 深明君人之道 是時 天下皆已嚮心이러니 曁嗣位 勵志圖治하고 推誠任人하며 每曰 爲人君止於仁耳라하다
故弘施霈澤하야 悉罷科買하고 已逋責하며 詢民隱하고 急農事하며 褒舊勞하고 擧墜典하며 增文武官俸하고 加軍士食米하며 修舊政하야
賜文臣誥勅하고 予歸省告而歸省者 賜賚有制하며 禁告誹謗하고 申嚴自宮之禁하고 及禁加人宮刑하며 屢飭法司하야 崇寬厚戒深刻하야 惟日以恤人爲務이라
在位僅十月이나 而德政加多 故遺詔初下 百姓如喪慈父 廟號曰仁이라하니 天下之公言云이러라


33-1-58
사신史臣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룁니다.
“인종께서는 천품天禀이 순수하고 명철하였으며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이 지극한 성품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께서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처음 동궁東宮에 있을 때는 빠짐없이 민정民情을 다 살폈고 이미 즉위하고 나서는 뜻한 바를 모두 실행하였으니, 매번 조서詔書를 내릴 때마다 군민軍民들이 가뭄에 단비가 내리고 기갈飢渴음식飮食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손뼉을 쳤습니다.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재계齋戒한 다음 기도를 드리고 군현郡縣에서 기아飢餓와 흉년으로 상언上言하면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진휼하고 조세를 감면하게 하였으며 백성의 급한 일을 급하게 여기기를 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습니다. 또 정사政事에 임하고 국가의 대체大體를 만나서는 이익을 계산한 적이 없었으니, 항상 이르기를, ‘이익을 미루어 백성百姓을 두터이 할 수 있으면 국가國家가 장차 큰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감식안이 밝아서 조정 신하들의 재행才行문학文學고하高下를 마음으로 명료하게 알고 완급緩急에 따라 임용함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금이라도 장점이 있어 임용할 만하면 모두 버리지 않았고 만일 명의名義를 범하면 비록 재능이 있더라도 반드시 내쳐서 일찍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시비是非의 공정함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장수將帥를 임용할 때는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렸으며 변경의 방비를 엄중하게 하여 원대한 계획을 잊지 않았으니, 변경으로 부임하는 장수가 하직할 때 매번 유시하기를, ‘민력民力이 피폐해졌으니, 삼가 을 탐하여 사단을 만들지 말라. 오랑캐들이 변경에 이르렀을 때는 순종하면 어루만지고 거역하면 막고 몰아내야 할 뿐이니, 화란의 단서를 열어서 명을 어기고 을 구하려 하지 말라. 내가 장려하는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 있는 자에게 시상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는 일은 〈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하게 하였고, 장리贓吏를 미워하여 누차 법사法司에 경계하기를, ‘장리는 백성을 괴롭혀 자신이 부유해지려고 힘쓰는 자이니, 국가가 백성을 구휼하는 일은 반드시 장리를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찍이 용서한 적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학교學校를 중시하고 천거薦擧를 엄중히 하여 매번 해당 관사에 유시할 때,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실재實材를 찾고 관직을 제수할 때는 반드시 실효實效를 구하게 하였습니다.
직언直言 듣기를 좋아하여 말한 바가 이치에 절실하면 대부분 칭찬하는 대답을 들었고, 간혹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비록 잠시 불편한 마음이 들긴 하였으나 조금만 지나면 문득 알아듣고 다시 하사품을 더해주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이 혹 조금 지나치기라도 하면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후회가 되면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유학儒學에 뜻을 두고 부지런히 학문學問하여 여러 경전經典을 모두 통독通讀하고 ≪서경書經≫에 더욱 익숙하였으니, 일찍이 이르기를, ‘정치를 하는데 이 책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비록 을 이루더라도 구차할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또 ≪춘추春秋≫에 대해서는 탄식하기를, ‘선왕先王가 무너졌으니, 이 책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하였습니다.
복서卜筮는 세속의 점법占法을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주역周易≫에서 바른 도리를 취하였는데, 괘효卦爻단상彖象의 내용 및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설명을 반복하여 매우 돈독하게 믿었습니다. 또 옛 제도制度를 즐겨 연구하여 성인聖人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찬선贊善 박흡다문博洽多聞이 한 시대에 으뜸이어서 자주 모시고 논의論議하였는데, 물러나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천자天資가 명철하시니 신하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학문學問하여 터득한 것은 반드시 여러 가지 행사行事에 드러내었고,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조탁彫琢수식修飾을 일삼지 않아서 뜻이 전달되면 그만두었습니다. 찬선贊善 이 일찍이 ‘를 지을 때는 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인종이 이르기를, ‘≪시경詩經≫ 300 가운데 작시법作詩法에 따라 지은 시가 어디에 있던가?’ 하였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일은 없었고 오직 경적經籍법서法書를 매우 많이 쌓아두고 한가할 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의복은 넉넉하여 유자儒者의 옷과 같았습니다.
어릴 때 곁에서 태조太祖를 모시며 천상天象에 대해 깨우쳤는데, 장성한 뒤에는 더욱 탐구하여 혹 에서 아뢴 말 가운데 휘피諱避하는 내용이 있으면 번번이 추궁하고 힐문하였습니다. 즉위한 뒤에는 대궐 안에 천문대를 지어놓고 때로 관찰하면서 미리 길흉의 감응을 말하여 묘하게 적중한 적이 많았는데, 재변灾變을 만나면 반드시 경칙警飭하였습니다.
스스로 검박儉薄하게 생활하면서 항상 국가를 창업하신 조종祖宗의 부지런함을 생각하여 매사에 반드시 조종의 이 어떠하였는지 물었고, 또 이르기를, ‘조종의 법을 따르는 자는 마땅히 조종의 마음을 밝게 알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시신侍臣을 소집하여 태조太祖께서 직접 지은 황릉비문皇陵碑文을 적게 한 다음 여러 아들에게 주어 익숙히 읽게 하며 이르기를, ‘이것을 알면 거의 부귀富貴를 보전하는 방법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명하여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간행하게 한 다음 여러 아들에게 내려주면서 이르기를, ‘윗사람이 되어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해서는 안 되고, 신하가 되어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20년 동안 저위儲位에 있으면서 군주의 도리에 매우 밝았으므로 당시 천하의 민심이 모두 귀의하였는데, 황위皇位를 계승하기에 미쳐서는 뜻을 가다듬어 치세治世를 도모하고 정성을 미루어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매번 이르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뭄 끝에 쏟아지는 단비와 같이 은택을 크게 베풀어 를 모두 혁파하고 을 탕감하였으며, 백성의 고충에 대해 묻고 농사일을 시급하게 여겼으며, 전일의 노고를 표창하고 문란한 법도를 바로잡았으며, 문관과 무관의 봉록을 인상하고 군사軍士식미食米를 보충하였으며, 구정舊政개수改修하였다.
그런 다음 문신文臣에게 고명誥命하는 칙서를 내리고 귀성歸省을 청하면 허락하되 귀성하는 사람에게는 하사품을 내리는 데 일정한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비방誹謗에 대해 고하는 풍조를 금지하였습니다. 또 자궁自宮(스스로 거세하는 것)의 금법을 더욱 엄중히 하고 사람에게 궁형宮刑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누차 법사法司에 신칙하여 관후寬厚함을 숭상하고 각박함을 경계하여 오직 날로 백성의 구휼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재위 기간은 겨우 10개월이었지만 덕정德政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유조遺詔가 처음 내려졌을 때 백성百姓들이 마치 자애로운 아비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습니다. 묘호廟號인종仁宗이라 하였으니, 이는 천하天下의 공론이었습니다.”


역주
역주1 小康 : 儒家에서 理想으로 삼는 大同社會의 전 단계로, 소란하던 세상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를 말한다.(≪禮記≫ 〈禮運〉)
역주2 陳濟 : 1363~1424. 明나라 常州府 武進 사람으로, 자는 伯載이다. 博覽强記하여 經史와 百家의 저서에 통달하였다. 永樂 초에 대신들의 천거를 받아 布衣로 ≪永樂大典≫의 편찬에 都總裁를 맡았고, 책이 완성되자 左春坊 右贊善에 올랐다. 황태자의 존경을 받아 다섯 皇孫이 모두 그에게 경전을 공부하였다. 저서에 ≪書傳補≫, ≪通鑑綱目集覽正誤≫, ≪思齋集≫ 등이 있다.
역주3 王汝玉 : ?~1415. 明나라 蘇州府 長洲 사람으로 호는 靑城山人이다. 17세에 浙江鄕試에 합격하였다. 洪武 末에 郡學敎授에 천거되어 翰林五經博士에 발탁되었다. 永樂 初에 春坊贊善이 되어 ≪永樂大典≫ 撰修에 참여하였다. 저서에 ≪靑城山人集≫ 등이 있다.
역주4 欽天監 : 明淸時代에 天文曆數의 관측을 맡은 관아로, 천문 계산, 月曆 계산, 曆書의 편수, 時報 등, 천문․기상 현상의 관측과 기록을 관장하였다.
역주5 人君이……뿐이다 : 仁의 경지에 이른 뒤에는 거기서 멈추어 옮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大學≫ 傳 3章에서 文王의 덕을 찬미하며 “人君이 되어서는 仁에 그치시고, 人臣이 되어서는 敬에 그치시고, 人子가 되어서는 孝에 그치시고, 人父가 되어서는 慈에 그치시고, 國人과 더불어 사귐엔 信에 그치셨다.[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6 科買 :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민간에 할당하여 강제로 사들이는 것을 말한다.
역주7 逋欠 : 租稅나 還穀의 滯納 등으로 官物에 결손이 생기게 하는 것 또는 그 물품을 말한다. 흉년 등의 이유로 여러 해에 걸친 포흠이 있는 경우에는 蕩減을 의논하게 된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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