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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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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5
○五月 上帥舟師攻蠻子海牙于峪溪口하야 大敗其衆하고 遂與諸將으로 定渡江之計한대 諸將咸欲直趨金陵하니 上曰 取金陵이면 必自采石始 采石 南北喉襟이니 得采石이면 金陵可圖也라하다
六月 上率徐達馮國用邵榮湯和李善長常遇春鄧愈耿君用毛廣廖永安하야 各引舟渡江할새 上與永安으로 擧帆前行한대 永安請所向이라
上曰 采石 大鎭이니 其備必固 牛渚磯 前臨大江하니 彼難爲備禦 今往攻之 其勢必克이라하고 乃引帆向牛渚한대
風力稍勁하야 頃刻及岸이어늘 守者驚駭하야 出兵來拒라가 上麾甲士以進하니 敵不支하야 卽走
常遇春 奮戈先登하고 諸軍 鼓勇繼之하니 采石鎭兵 驚潰하고 遂拔之하니 緣江諸壘 望風迎附하다
遂乘勝하야 徑取太平하고 執其萬戶納哈出이라 太平路總管靳義 出東門하야 赴水死한대 上聞之曰 義士也라하고 具棺斂葬之하다
耆儒李習陶安等 率父老하고 出城迎上한대 安見上狀貌하고 謂習等曰 龍姿鳳質이니 非常人也 我輩今有主矣라하다
上之發采石也 先令李善長으로 爲戒戢軍士榜한대 比入城 卽張之하니 及拔城 士卒 欲剽掠이라가 見榜揭通衢하고 皆愕然不敢動이라
有一卒違令이어늘 卽斬以徇하니 城中肅然이라 富民陳迪等 獻金帛하니 卽以分給諸將士 改太平路하야 爲太平府
諸將 奉上爲大元帥하니 命諸將하야 分守各門하고 修城浚濠하야 以固守禦


29-1-5
5월에 태조가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욕계구峪溪口에서 만자해아蠻子海牙를 공격하여 그 무리를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장강長江을 건널 계획을 정했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곧바로 금릉金陵으로 진격하고자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금릉을 취하려면 반드시 채석采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채석은 남북의 요충지이니, 채석을 얻으면 금릉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에 태조가 서달徐達소영邵榮이선장李善長경군용耿君用모광毛廣 등을 거느리고 각각 배를 인솔하여 장강을 건널 때 태조가 요영안과 함께 돛을 올려 앞서 갔는데, 요영안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태조가 이르기를, “채석은 큰 이니 그 수비가 반드시 견고할 것이고, 우저기牛渚磯는 앞으로 큰 강에 닿아 있으니 저들이 방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가서 공격하면 그 형세로 볼 때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이에 선박을 인솔하여 우저기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어서 잠시 만에 강가에 이르렀는데, 지키던 군사들이 깜짝 놀라 병장기를 꺼내어 와서 항거하다가 태조가 갑사甲士를 지휘하여 진격하니 적이 버티지 못하고 바로 달아났다.
또 상우춘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올라가고 군사들이 용기를 북돋워 따라 올라가니, 채석진采石鎭의 병졸들이 놀라 궤멸되고 마침내 채석진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연안의 여러 보루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항복하여 태조를 맞이하였다.
마침내 승세를 타서 곧바로 태평太平을 함락시키고 만호萬戶 를 사로잡았다. 태평로太平路총관總管 근의靳義동문東門으로 나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태조가 그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의사義士로다.” 하고, 관렴棺斂을 갖추어 장사 지내게 하였다.
이 높은 노유老儒 이습李習 등이 부로父老들을 인솔하고 을 나와 태조를 맞이하였는데, 도안이 태조의 모습을 보고 이습 등에게 이르기를, “의 자태이고 의 자질이니,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야 주인을 만난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채석采石을 출발할 때 먼저 이선장李善長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경계警戒하여 금지禁止하는 내용으로 방문榜文을 짓게 하였는데, 성에 들어왔을 때 바로 그 방문을 게시하니, 성을 함락했을 때 사졸士卒들이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려 하다가 사거리에 게시된 방문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당시 사졸士卒 한 명이 명을 어겼는데, 즉시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성중城中이 두려워하였다. 또 부유한 백성 진적陳迪 등이 황금과 비단을 바치자 바로 여러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태평로太平路태평부太平府로 고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대원수大元帥로 받드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각각 성문城門을 나누어 지키게 한 다음 성을 보수하고 해자를 준설浚渫하여 견고하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馮國用 : 1323~1358. 濠州 定遠 사람으로 明나라 때의 武將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兵法에 정통했다. 처음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가 뒤에 朱元璋에게 투항했다. 주원장에게 먼저 金陵을 취할 것을 건의했고, 渡江 후에 공을 세워 軍指揮使가 되었다. 후에 浙江省 紹興을 공격할 때 군중에서 순국했다. 사후에 郢國公으로 추봉되었다.
역주2 湯和 : 1326~1395. 濠州 사람으로 자는 鼎臣이다. 明나라 때의 武將으로 開國功臣이다. 1352년에 郭子興의 봉기군에 참가하여 千戶가 되었고, 朱元璋을 따라 長江을 건너 集慶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워 統軍元帥, 征南將軍 등을 지냈다. 사후에 東甌王으로 추봉되었고, 시호는 襄武이다.
역주3 常遇春 : 1330~1369. 鳳陽府 懷遠縣 사람으로 자는 伯仁이고, 호는 燕衡이다. 元나라 말기에 紅巾軍의 武將 출신으로 明나라의 開國名將이다. 朱元璋에게 투항하고 전쟁에 참전하여 선봉에 서서 공을 세웠다. 일찍이 스스로 10만 대군을 통솔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벼슬은 中書平章軍國重事를 지냈고, 鄂國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開平王으로 추증되었다.
역주4 鄧愈 : 1337~1377. 虹縣 사람으로 본래의 성명은 鄧友德이고, 자는 伯顏이다. 明나라 開國名將, 征西將軍이다. 16세에 병사를 이끌고 元나라에 대항했다. 1355년 1만여 명을 이끌고 朱元璋에게 투항하여 管軍總管이 되었다. 이때 주원장이 그의 이름을 고쳐, 鄧愈라고 하였다. 주원장을 따라 長江을 건너, 太平, 集慶을 공격하고 鎮江을 취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廣興翼元帥가 되었다. 그 후에 僉行樞密院事, 江西行省參知政事, 江西行省右丞, 湖廣行省平章, 右御史大夫, 太子諭德 등을 역임했다. 1370년 徐達을 따라 甘肅을 정복하고 北元軍을 격퇴시키고, 吐蕃, 烏斯藏 등 여러 부족을 항복시켰다. 그 공으로 榮祿大夫, 衛國公으로 봉해졌다.
역주5 廖永安 : 1320~1366. 元明 교체기 때 廬州府 巢縣 사람이다. 元나라 말에 水軍을 이끌고 巢湖에서 朱元璋에게 귀순했다. 강을 건넌 뒤 크고 작은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모두 공을 올려 同知樞密院使에 발탁되었다. 나중에 太湖에서 張士誠의 장수 呂珍과 전투를 벌였는데, 배가 얕은 지역에 좌초되어 포로로 잡혔다. 8년 동안 갇혀 있다가 吳에서 죽었다.
역주6 納哈出 : ?~1388. 元나라 초기 功臣의 후예로서, 대대로 遼東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의 국세가 떨어진 말기에는 瀋陽을 근거지로 해서 스스로 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후에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하여 海西侯에 봉해지고 雲南 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역주7 陶安 : 1315~1368. 자는 主敬으로 當塗 사람이다. 李習에게 배웠으며, 元나라 至正 초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태조가 洪武 초에 知制誥에 임명하고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학문이 淳正하였으며 특히 ≪周易≫에 깊이가 있었다. ≪陶學士集≫, ≪周易集粹≫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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