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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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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臣論曰
宇量弘厚하야 造次 必於仁恕하고 容納讜正하야 未甞失色於人하고 明達善謀하야 能斷大事
故得撫寧萬國하고 綏靜四方이라 承魏氏奢侈弊之後하야
百姓思古之遺風하니 乃勵以恭儉하며 敦以寡慾하고 雅好直言하야 留心采擢하니 劉毅裴楷 以質直見容하고 嵇紹許奇 雖仇讐不棄하니
仁以御物하고 寬而得衆하야 宏略大度有帝王之量焉이라
聿修武用하고 思啓封疆하야 决神筭於深衷하고 斷雄圖於議表한대 馬隆西伐하고 王濬南征 師不延時호되 獯虜削跡하고 兵不血刃호되 揚越爲墟하야 通上代之不通하고 服前王之未服하니 王業之成大矣哉로다
惜乎 帝名受魏禪 難逃廢主之譏하고 始雖勤儉이나 終罹奢縱之過하야 政事敗於三楊之用하고 心術蠱於羊車之遊하야 雜處五胡 終致禍亂하니 方諸前代之令主 不能無歉焉이로다


13-1-17 사신史臣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무제는 도량이 넓고 후덕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어질고 관대하였으며 직언直言을 받아들여 일찍이 사람들 앞에서 낯빛을 잃은 적이 없었으며 사리에 밝게 통하고 잘 도모하여 능히 큰일을 결단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국萬國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고 사방四方을 안정시켜 고요하게 하여 사치스러운 폐단이 지극해진 나라의 뒤를 계승하였다.
백성百姓들은 옛날의 유풍遺風을 생각하여 공검恭儉에 힘쓰고 과욕寡慾에 돈독하였으며, 신하들은 평소 직언直言을 좋아하여 채적采擢되기에 마음을 두었으니, 유의劉毅배해裴楷는 질박하고 정직함으로 용납되었고 혜소嵇紹허기許奇는 비록 원수였지만 버려지지 않았다.
무제는 인자함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관용으로 대중의 마음을 얻었으니, 지략이 크고 풍도가 넓어서 제왕의 도량이 있었다.
무제는 무용武勇을 쓰고 영토 넓히기를 생각하여 깊은 충심衷心에서 귀신 같은 계획을 결정하고 군신群臣의표議表에서 웅대한 도모를 결단하였는데, 마륭馬隆이 서쪽을 토벌하고 왕준王濬이 남쪽을 정벌함에 군사들이 시일을 끌지 않아도 오랑캐가 자취를 감추었고 병장기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지역이 빈 터가 되어 전대前代에 통하지 않던 지역을 통하게 하고 전왕前王이 복종시키지 못했던 나라를 복종시켰으니, 왕업王業의 완성이 위대하였도다.
애석하도다. 무제는 명색이 나라의 선위를 받았다고 하였지만 군주를 폐위하였다는 기롱을 피하기 어려웠고, 처음에는 비록 부지런하고 검약하였지만 끝내는 사치스럽고 방종하였다는 허물에 빠져서 정사政事을 등용한 데서 실패하였고 심술心術의 유희에 빠져서 오호五胡와 함께 패권을 다투다가 끝내 화란(영가永嘉의 난)을 초래하였으니, 전대前代의 훌륭한 군주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점이 없을 수 없다.”


역주
역주1 三楊 : 晉나라 말기에 국권을 전횡하였던 楊駿과 楊珧 및 楊濟의 권세가를 가리킨다.
역주2 羊車 : 輦車를 말한다. 武帝는 吳나라를 평정한 뒤에 연회를 자주 열고 정사를 게을리하였는데, 궁녀를 1만여 명이나 거느리고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다가 양이 머무는 곳의 궁녀와 잠을 잤으므로, 궁녀들은 다투어 댓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 양을 유인했다고 한다.(≪通鑑節要≫ 권26 〈晉紀〉 世祖武皇帝)
역주3 (革)[刻] : 저본에는 ‘革’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권3 〈武帝紀〉에 의거하여 ‘刻’으로 바로잡았다.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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