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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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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7
○右諫議大夫史館修撰田錫臨終 自作遺表하야 勸帝以慈儉守位하며 以淸淨化人하며 居安思危하며 居理思亂하니 帝覽之惻然이러라
帝嘗見錫色必莊하고 目之曰 此吾之汲黯也라하더니 至是 謂宰相李沆曰 田錫 直臣也 天何奪之速乎
嬰疾以來 朕日遣太醫診療러니 卒不能起로다 盡心匪懈하야 始終如一하니 若此諫官 誠不易得이라 朝廷小有闕失하야 方在思慮 錫之章奏已至矣 不顧其身하고 惟國家是憂하니 孰肯如此리오 朕每覽其章 必特召與語以奬激之로라
於是 優詔贈工部侍郞하고 賻賵加等하고 以其子將作監主簿慶遠慶餘 竝爲大理評事하야 給俸終喪하고 命有司錄其事하야 布告天下하다
其後錫妻亡커늘 亦詔二子不絶廩給하다


22-1-17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사관수찬史館修撰 이 임종할 때 스스로 유표遺表를 지어 진종에게 자애롭고 검약儉約함으로 제위帝位를 지키고, 청정淸淨함으로 사람을 감화시키고, 편안히 지낼 때에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움을 생각하기를 권하니, 진종이 보고서 슬퍼하였다.
진종이 일찍이 전석의 안색이 반드시 장엄한 것을 보고서 지목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상 에게 이르기를, “전석은 곧은 신하이다. 하늘이 어찌하여 빨리 빼앗아간단 말인가.
전석이 병에 걸린 이후로 짐이 날마다 태의太醫를 보내 진료하게 하였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마음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니, 이런 간관은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한다. 조정에 작은 잘못이 있어서 고민하고 있으면 전석의 장주章奏가 이미 이르러 있었다. 그 몸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라만을 근심하였으니, 누가 이와 같이 하려고 하겠는가. 짐이 매번 그의 소장을 볼 때마다 반드시 특별히 불러 그와 이야기하여 칭찬하고 격려하였다.” 하였다.
이에 우악優渥한 조서를 내려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추증하고, 등급을 올려서 부의賻儀하고, 그의 아들인 장작감주부將作監主簿 전경원田慶遠전경여田慶餘를 모두 대리평사大理評事로 삼아 을 마칠 때까지 녹봉을 주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고 천하에 포고하게 하였다.
그 후에 전석의 처가 죽자 이때에도 두 아들의 녹봉이 끊이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다.


역주
역주1 田錫 : 940~1003. 宋나라 嘉州 洪雅 사람으로, 자는 表聖이다. 魏徵과 李絳을 본받아 權臣과 貴寵을 막론하고 누구든 잘못이 있으면 直言하여 평생을 諫諍으로 자신의 任務를 삼았다. 封疏 53권이 있는 것을 모두 불사르면서, “直諫은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 副本을 간직하여 직간을 자랑하겠는가.”라고 했다. 저서에 ≪咸平集≫이 있다.
역주2 汲黯 : 前漢 濮陽 사람으로, 자는 長孺이다. 景帝 때에 太子洗馬로 있으면서 태도가 엄숙하여 태자가 그를 꺼려할 정도였고, 武帝 때 謁者, 東海太守, 主爵都尉 등을 지내면서 직간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무제가 莊助에게 급암의 인물됨을 묻자, 장조가 “급암이 관직에 처하는 것은 남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만, 少主를 보좌함에 이르러서는 守城을 깊고 견고하게 하여 오라고 해도 오지 않고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인물이니, 孟賁이나 夏育과 같다고 자칭하는 자라 하더라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무제가 “그렇다. 옛날에 社稷之臣이 있었는데, 급암과 같은 자는 이에 가깝다.”라고 하였다.(≪史記≫ 권120 〈汲黯列傳〉)
역주3 李沆 : 947~1004. 宋나라 肥鄕 사람으로, 자는 太初이다. 太宗과 眞宗 때 사람으로, 벼슬은 尙書右僕射에 이르렀고, 太尉ㆍ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文靖이다.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세상 풍속을 진정시켰으며, 先見之明이 있는 명재상으로 일컬어진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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