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丁은 帝小乙之子也라 自爲太子時로 能盡知人民之所好惡하야 修聳其德하야 達于神明하니라
武丁이 宅憂亮陰三年하고 旣免喪에 其惟弗言이어늘 群臣咸諫于武丁曰 王言을 惟作命하나니 不言하시면 臣下罔攸稟令하니이다
武丁이 乃作書以誥曰 以台로 正于四方이실새 台恐德弗類하야 玆故弗言하야 恭默思道하더니 夢에 帝賚予良弼하시니 其代予言이니라
於是에 審厥象하야 俾以形으로 使百工營求之野하야 得說於傅巖中하니
是時에 說 爲胥靡하야 築于傅巖하더니 見于武丁한대 武丁曰 是也得이라하고 而與之語하니 果聖人이라
擧以爲相하야 置諸左右하고 命之曰 朝夕納誨하야 以輔台德하라 若金이어든 用汝作礪하며 若濟巨川이어든 用汝作舟楫하며 若歲大旱이어든 用汝作霖雨하리니 啓乃心하야 沃朕心하라
若藥弗瞑眩이면 厥疾弗瘳하며 若跣弗視地면 厥足用傷하리니 惟曁乃僚로 罔不同心하야 以匡乃辟하야 俾率先王하야 迪我高后하야 以康兆民케하라
說이 旣受命하고 進諫論列天下之事하니 君臣道合하야 政事修擧하니 於是에 開先祖之府하야 取其明法하야 以爲君臣上下之節하니라
武丁이 肜祭成湯할새 有飛雉升鼎耳而雊어늘 祖己作訓以戒武丁하니 武丁이 內反諸己하야 以思王道하니 三年에 蠻夷編髮重譯來朝者六國이러라
鬼方이 無道어늘 武丁이 伐之하야 入其險阻하야 以致其衆하야 三年而克之하고 盡平其地하니
故殷武之詩曰 撻彼殷武하야 奮伐荊楚로다 冞入其阻하야 裒荊之旅하야 有截其所하니 湯孫之緖라하니라
自是修政行德하니 天下咸驩하야 殷道復興하야 號曰高宗이라하니라
周公이 作無逸之書曰 其在高宗時에 舊勞于外하사 爰曁小人이러시니 作其卽位하사 乃或亮陰三年不言하시니 其惟不言하시나 言乃雍하시며 不敢荒寧하사 嘉靖殷邦하사 至于小大히 無時或怨하니
4-5-1 무정은 帝
의 아들이다.
태자太子 때부터 백성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모두 알아서 그 덕을 닦고 삼가서
신명神明에게까지 통하였다.
무정이 양암亮陰에서 3년 동안 거상居喪하고, 상喪을 벗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군신群臣들이 모두 무정에게 간언하기를, “왕王의 말씀을 명령으로 삼나니, 왕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신하들이 명령을 받을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무정이 이에 글을 지어
고誥하기를, “나로써
사방四方을 바로잡게 하시기에 나는 덕이
선인先人과 같지 못할까 두려워 이 때문에 말하지 않고 공손하고 침묵하여
도道를 생각하였는데, 꿈에
상제上帝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내려주셨으니, 그가 나의 말을 대신할 것이다.” 하였다.
夢賚良弼
그러고 나서 꿈에 본 사람을 군신君臣과 모든 관리 가운데에서 확인해보았는데 모두 아니었다.
이에 꿈에 본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려 백관으로 하여금 초야에 가서 찾게 하여 부암傅巖에서 부열傅說(부열)을 찾았다.
이때에 부열이 노예가 되어 부암에서 제방을 쌓고 있다가 무정을 뵈었다. 무정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맞다.” 하고 그와 얘기를 해보니 과연 성인聖人이었다.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아 곁에 두고서 명하기를,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주어서 나의 덕을 도우라. 만약 쇠가 있으면 너를 숫돌을 삼을 것이며, 만약 큰 내를 건넌다면 너를 배와 노로 삼으며, 만약 큰 가뭄이 든다면 너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 네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에 쏟아 붓도록 하라.
만약 약藥이 독하여 어지럽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으며, 만약 맨발로 땅을 살피지 않으면 발이 상할 것이다. 네 관속官屬들과 더불어 마음을 함께하지 않음이 없어 네 군주를 바로잡아 선왕先王의 도道를 따라 우리 성탕成湯의 자취를 따라서 억조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부열이 명을 받고 나서 천하의 일을 논열하여 아뢰니 군신간의 도가 합치되어 정사가 제대로 베풀어졌다. 이때에 와서 선조의 부고府庫를 열어 밝은 법을 취하여 군신君臣과 상하의 절목으로 삼았다.
무정이 성탕에게 융肜제사를 지낼 때에 꿩이 날아와 정鼎의 귀[이耳]에 앉아서 울자 조기祖己가 훈訓을 지어 무정을 경계시키니, 무정이 안으로 자기를 반성하여 왕도를 생각하자 3년 만에 변발을 한 만이蠻夷 중에 몇 번의 통역을 거쳐 와서 조회한 나라가 여섯 개국이었다.
귀방鬼方이 무도無道하니 무정이 정벌하여 험악한 곳에 들어가 그 무리들을 오게 하여 3년 만에 이기고 그 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그러므로 〈
시에 이르기를, “날랜 저 은나라 왕의
무용武勇으로
형초荊楚를
분연奮然히 정벌하셨도다. 그 험악한 곳을 무릅쓰고 들어가 형초의 무리들을 취합시켜 그 지방을 정연하게 만드시니 탕임금 후손의
공업功業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정사를 바르게 행하고 덕을 행하니 천하가 모두 기뻐하여 은나라의 도가 부흥하였으므로 묘호를 고종高宗이라고 하였다.
주공周公이 〈무일無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옛날 고종 때에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로워 이에 소인小人(서민)들과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 즉위하시어 곧 양암亮陰에서 3년 동안 말씀하지 않았으니, 말씀하지 않았으나 말씀하면 화和하였으며, 감히 게으르고 안일하지 아니하여 은나라를 아름답게 하고 안정시켜 크고 작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에 혹시라도 원망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종의 향국享國이 59년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