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又嘗諭輔臣曰 朕於機務之暇에 惟好讀書하노니 觀前古之興衰하고 考當時之得失하야 善者從之하고 不善者以爲戒하니 每見叔世之君所爲不善에 使人汗下하야 幾代其羞라
且如唐季諸君이 以破朋黨去宦官爲難이나 以朕思之컨대 殊不難也라 凡事는 只擧偏補弊하고 防微杜漸하야 銷患於冥冥이니 若必待顯著而後治之면 則費力矣라하다
又曰 自古人主讀書나 少有知道하고 知之라도 亦罕能行之라 且如與人不求備하고 檢身若不及二句를 人君豈不知리오 自是不能行하고 甚者는 但作歌詩如隋陳之君하니 竟亦何補리오
唐德宗豈不知書리오 然所行不至하니 陸贄論諫하야 諄複不已者는 正欲德宗知而行之라 如魏徵於太宗은 則語言不甚諄複이라
且當德宗하야 禍亂果何等時오 而與陸贄論事에 皆使中人傳旨하니 夫事有是非에 當面反覆詰難이라도 猶恐未盡이어든 中人傳旨하니 又安能盡이리오 朕每事에 以太宗爲法하고 以德宗爲戒하노라하다
효종이 또 일찍이 보신輔臣들에게 효유하기를, “짐은 나라의 기무機務를 보는 여가에는 오직 독서를 즐길 뿐이다. 전고前古의 흥망을 살피고 당시當時의 득실을 상고하여 선善한 것은 따르고 선善하지 못한 것은 경계로 삼으니, 늘 말세의 임금이 행한 선善하지 못한 일을 볼 때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땀을 흘리게 해서 거의 그 부끄러움을 대신 느끼게 한다.
또 당唐나라 말기의 여러 임금들 같은 경우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환관宦官을 제거하는 것을 어렵다고 여겼지만, 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무릇 일은 단지 한쪽을 들어 폐단을 돕고 기미를 막고 조짐을 막아서 보이지 않을 때 근심을 없애야 할 뿐이니, 만일 반드시 현저하게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에 다스리려 한다면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예로부터
인주人主가 독서하지만
도道를 아는 사람이 적었고, 도를 알았더라도 또한 능히 행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또 예컨대
라는 두 구절을
군주君主가 어찌 알지 못했겠는가. 스스로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수진隋陳의 임금들처럼 단지
시가詩歌만 지었을 뿐이니, 마침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당唐 덕종德宗이 어찌 ≪서경書經≫을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행실이 지극하지 못했으니, 육지陸贄가 논간論諫하여 그치지 않고 정성스럽게 반복했던 이유는 실로 덕종이 도리를 알아서 행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위징魏徵의 경우 당唐 태종太宗에게 정성스럽게 반복하는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또 덕종德宗 때는 화란禍亂이 과연 어떤 시절이었던가. 그런데도 육지와 나랏일을 논할 때 모두 중인中人[환관宦官]으로 하여금 어지御旨를 전하게 하였으니, 대저 시비是非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직접 만나 반복하여 논란하더라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중인中人이 어지御旨를 전하였으니 또한 어찌 다할 수 있었겠는가. 짐은 매사에 태종을 법으로 삼고 덕종을 경계로 삼는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