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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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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六月 以田千秋爲丞相하야 封富民侯하고 以趙過爲搜粟都尉하다
先是桑弘羊言輪臺東有漑田五千頃以上하니 可遣屯田卒하야 置校尉하고 募民壯徤敢徙者하야 詣田所하야 墾田築亭하야 以威西國이라한대
上乃下詔하야 深陳旣往之悔曰 前有司奏欲益民賦三十하야 助邊用하니 是重困老弱孤獨也
今又請遣卒하야 田輪臺하니 輪臺西於車師千餘里
前擊車師하야 雖降其王이나 以遼遠乏食하야 道死者尙數千人이어든 況益田乎
匈奴常言漢極大 然不耐饑渴하니 失一狼走千羊이라하니라
乃者貳師敗 軍士死略離散하니 悲痛常在朕心이어늘 今又請遠田輪臺하야 欲起亭隧하니 是擾勞天下 非所以優民也 朕不忍聞하노라
大鴻臚等又議欲募囚徒하야 送匈奴使者하야 明封侯之賞하야 以報忿하니 此五伯所不爲也
當今務在禁苛暴止擅賦하고 力本農修馬復令하야 以補缺하야 毋乏武備而已
郡國二千石各上進畜馬方略補邊狀하야 與計對하라
自是不復出軍하고 而封田千秋爲富民侯하야 以明休息하며 思富養民也러라
又以趙過爲搜粟都尉하니 過敎民爲代田하야 一畮三甽 歲代處 故曰代田이라
每耨 輒附根하야 根深能風旱하고 其耕耘田器 皆有便巧하니 用力少而得穀多 民皆便之러라


8-1-18 여름 6월에 전천추田千秋승상丞相으로 삼아서 부민후富民侯에 봉하고, 수속도위搜粟都尉로 삼았다.
그전에 이 말하기를, “ 동쪽에 개전漑田 5,000 이상이 있으니, 둔전병屯田兵을 보내고 교위校尉를 두고, 백성 중에서 건장하고 이주하겠다는 자를 모집하여 개전漑田이 있는 곳으로 보내 더 개간하고 봉화대烽火臺을 설치하여 서쪽의 나라들에게 위엄을 보이십시오.” 하였다.
무제가 이에 조서를 내려 지난 일을 몹시 후회하여 말하기를, “전에 유사有司가 아뢴 것은 백성들에게 세금 30을 더 부과하여 변방의 경비를 보조하고자 한 것인데, 이는 노약자와 곤궁한 백성들을 거듭 곤궁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 또 군졸을 보내 윤대에 전지田地를 개간하라고 청하는데, 윤대는 에서 서쪽으로 천여 리나 떨어져 있다.
지난날 거사를 쳐서 그 왕에게 항복을 받았으나 거리가 멀고 식량이 부족해서 도중에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하물며 전지를 더 개간한단 말인가.
흉노匈奴가 평소 말하기를, ‘한나라는 지극히 크지만 기갈飢渴을 견디지 못하니, 라고 하였다.
지난번 에 군사들이 죽고 포로가 되어 흩어졌으니 비통한 마음이 항상 짐의 마음에 있는데 지금 또 멀리 윤대의 전지를 개간하기를 청하여 봉화대를 만들려고 하니, 이것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수고롭게 하는 것이지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짐은 차마 듣지 못하겠다.
지금에 힘쓸 일은 포학을 금하고 함부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며 농업에 힘쓰고 말을 기르는 자에게 급복給復하는 제도[마복령馬復令]를 정비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무비武備가 결핍되지 않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군국郡國이천석二千石은 각각 말을 기를 방략方略과 변방을 보완할 수 있는 의견을 올려서 상계리上計吏와 함께 와서 아뢰라.”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고, 전천추를 부민후富民侯에 봉하여 휴식休息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백성을 부유하게 기를 것을 생각하였다.
또 조과를 수속도위搜粟都尉로 삼으니 조과가 백성에게 을 가르쳤는데, 1에 세 이랑을 만들어 해마다 바꾸어가며 경작하였기 때문에 대전代田이라고 하였다.
김을 맬 때마다 뿌리를 북돋아주어 뿌리가 깊어서 바람과 가뭄을 견디게 하고, 밭 갈고 김매는 농기구를 모두 편리하고 정교하게 만드니 힘은 적게 들이고 거두는 곡식은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다.


역주
역주1 趙過 : 한 무제 때 搜粟都尉가 되어 代田法을 시행했으며, 耕耘․落種 등에 사용하는 농기구를 제작했다.(≪漢書≫ 권24 〈食貨志 上〉)
역주2 桑弘羊 : B.C. 152~B.C. 80. 西漢 河南 洛陽 사람으로, 상인의 아들이었다. 13세에 心計를 써서 무제의 侍中이 되었다. 鹽鐵法과 均輸平準法을 실시하여, 국가의 이익을 따지는 데 있어서 백성의 아주 미세한 것까지 하였으므로, 국가의 이익은 매우 컸다. 그러나 후세의 儒學者들로부터 한 무제 말기에 群盜가 일어난 것은 이 같은 가혹한 경제적 수탈 때문이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霍光 등과 함께 遺詔를 받고서 昭帝를 보좌하였다. 뒤에 자기의 공을 믿고 자신의 子弟들을 벼슬시키려 하다가 되지 않자 곽광을 원망하여 上官桀과 모반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漢書≫ 권24하 〈食貨志4하〉)
역주3 輪臺 : 윤대는 漢代 西域의 國名이다. 한 무제는 평생 서역을 정벌하는 데 주력하여 국력이 많이 고갈되었는데, 만년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마침내 윤대 지역을 포기하면서 아울러 자신을 자책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를 일러 ‘輪臺의 詔書’라고 한다.(≪漢書≫ 권96하 〈西域傳〉)
역주4 車師 : 西域에 있는 나라 이름인데, 車師前國과 車師後國이 있다. 거사전국은 장안에서 서쪽으로 8,150리 떨어져 있고, 거사후국은 장안에서 서쪽으로 8,950리 떨어져 있다. 漢나라 宣帝 때 이곳에 戊己校尉를 두고 屯田을 설치하였다가 폐지하였다.(≪漢書≫ 권96하 〈西域傳〉)
역주5 이리……격이다 : ≪資治通鑑綱目集覽≫에 “‘失一狼’은 匈奴가 이리로써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走千羊’은 羊으로써 漢나라를 비유한 것이다.[失一狼 匈奴以狼自比也 走千羊 以羊喩漢也]”라고 하였다.
역주6 貳師가……때 : 貳師는 貳師將軍 李廣利를 가리킨다. 征和 3년(B.C. 90)에 李廣利가 7만 騎를 거느리고 五原으로 나가서 匈奴를 치다가 패하여 흉노에게 살해되었다.(≪漢書≫ 권61 〈張騫李廣利傳〉)
역주7 죄수를……하니 : ≪資治通鑑≫ 권22 〈漢紀13〉 武帝 征和 4년조 胡三省 註에 “죄수들에게 單于를 찌르게 하여 분풀이를 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역주8 代田法 : 한 무제 때 조과가 搜粟都尉가 되었을 때에 처음으로 창설한 경작법이다. 일종의 輪作法으로 같은 경작지 내의 일부를 해바꿈하여 재배함으로써 지력의 소모를 막고 일정한 수확을 계속 올리게 하는 농법이다. 이 농법이 農地의 일부를 계속 묵혀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伊尹이 창설한 區田法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漢書≫ 권24 〈食貨志 상〉)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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