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王名
은 이니 厲王之子也
라 初
에 厲王暴虐侈傲
하니 國人
이 乃相與畔
하야 襲厲王
이어늘 王出奔於彘
라
時宣王爲太子하야 匿召公之家어늘 國人聞之하고 乃圍之하니 召公以其子代王太子한대 太子竟得脫이라
召公周公이 行政하야 號曰共和者러니 十四年에 厲王이 死於彘라 太子長於召公家하니 二相이 乃共立之하니 是爲宣王이라
宣王卽位에 二相輔之하야 修政하야 法文武成康之遺風하니 諸侯復宗周러라
遇災而懼하야 側身修行하야 欲消去之하니 天下喜於王化復行하고 周大夫仍叔이 作雲漢之詩하야 以美之하니라
元年에 以召穆公爲相하고 秦仲爲大夫하고 用樊侯仲山甫尹吉甫程伯休父虢文公申伯韓侯顯父南仲方叔張仲之屬하야 竝爲卿佐하야 安集兆民하다
是歲에 西戎殺秦仲이어늘 王命南仲召虎方叔吉甫하야 征定西戎이라
時衰亂之餘에 萬民離散하야 不安其居어늘 宣王能勞來還定安集之하야 至於鰥寡히 無不得其所러라
自厲王後로 四夷交侵이어늘 宣王이 內修政事하며 外攘夷狄하야 其修車備器也에 有車攻之詩하며 其考室也에 有斯干之詩하며 其考牧也에 有無羊之詩하며 其差馬也에 有吉日之詩라
命召公出平淮夷하며 吉甫北伐獫狁하며 方叔南征荊蠻이라
故能修文武之境土하야 會諸侯於東都하니 而周室中興焉하니라
5-5-1 선왕의 이름은 정靜이니 여왕厲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여왕이 포학하고 사치하고 오만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켜 여왕을 습격하자 왕이 체彘로 달아났다.
이때 선왕宣王이 태자太子가 되어 소공召公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포위하니 소공이 자기 아들을 여왕의 태자로 꾸며서 태자가 벗어날 수 있었다.
소공과 주공이 정사를 행하여 공화共和라고 하였는데, 14년에 여왕이 체彘에서 죽었다. 태자가 소공의 집에서 자랐는데 두 재상이 함께 그를 왕으로 옹위하니 이 사람이 선왕宣王이다.
선왕이 즉위하니 두 재상이 보좌하여 정치를 행해서 문왕과 무왕과 성왕과 강왕의 유풍遺風을 본받으니 제후들이 다시 주周나라를 종주국으로 삼았다.
선왕이 여왕이 끼친 재앙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천하에 큰 가뭄이 드니, 속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재이災異를 만나 두려워하여 경계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제거하려고 하니 천하 사람들이 왕의 교화가 다시 행해지는 것을 기뻐하였고,
주周나라 대부
잉숙仍叔이 〈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원년元年에 소목공召穆公을 재상으로 삼고, 진중秦仲을 대부로 삼고, 번후樊侯․중산보仲山甫․윤길보尹吉甫․정백휴보程伯休父(정백휴보)․괵문공虢文公․신백申伯․한후韓侯․현보顯父(현보)․남중南仲․방숙方叔․장중張仲의 무리를 등용하여 모두 경좌卿佐(임금을 보좌하는 집정대신)로 삼아 천하 백성을 안정시켰다.
이해에 서융西戎이 진중秦仲을 살해하자 왕이 남중南仲․소호召虎․방숙方叔․윤길보尹吉甫에게 명하여 서융을 정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이때 나라가 쇠하고 어지러운 뒤라서 만민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곳에 안주하지 못하였는데, 선왕이 수고로운 자를 위로하고 오는 자를 오게 하고 간 자를 돌아오게 하고 어지러운 자를 안정시키고 위태로운 자를 편안하게 하고 흩어진 자를 모여 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나 과부까지도 살 곳을 얻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여왕 이후로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입하자 선왕이 안으로는 정사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이적夷狄을 물리쳤는데,
거마車馬를 수리하고 무기를 갖춘 일에 대해서는 〈
이라는 시가 있었고,
궁실宮室을 지었을 때에 〈
이라는 시가 있었고, 가축을 잘 길렀을 때에 〈
이라는 시가 있었고, 말을 차출할 때에 〈
이라는 시가 있었다.
소공에게 명하여 회이淮夷를 평정하게 하고, 윤길보에게 북쪽으로 혐윤獫狁을 정벌하게 하고, 방숙에게 남쪽으로 형만荊蠻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문왕과 무왕 때의 강역疆域을 회복하여 동도東都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니 주나라가 중흥中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