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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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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45
○甞謂宰臣曰 卿等老矣 殊無可以自代者乎 必待朕知而後進乎아하고 顧右丞張汝霖曰 若右丞者丞相所言也
平章政事完顔襄及汝霖對曰 臣等苟有所知 豈敢不言이리오 但無人耳
金主曰 春秋諸國分裂하야 土地褊小호되 皆稱有賢才하니 卿等不擧而已 今朕自勉庶幾致治어늘 他日子孫 誰與共治者乎아하니 宰臣皆有慙色이러라
又曰 十室之邑 必有忠信하니 今天下之廣 人民之衆 豈得無人이리오 唐之顔眞卿段秀實 皆節義之臣也로되 終不升用하니 亦當時大臣 固蔽而不擧也 卿等當不私親故而擧忠正之人이니 朕將用之
他日 又曰 齊桓 中庸主也로대 得一管仲하야 遂成霸業하니 朕夙夜以思하야 惟恐失人하노니 朕旣不知하고 卿等又不薦하니 必俟全才而後擧 蓋亦難矣
如擧某人長於某事 朕亦量材用之 朕與卿等俱老矣 天下至大하니 豈得無人이리오 薦擧人材 當今急務也
又曰 人之有幹能 固不易得이나 然不若德行之士最優也


27-1-45
일찍이 재신宰臣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늙었으니, 자못 경들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반드시 짐이 〈경들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알기를 기다린 뒤에 대신할 사람을 추천하려는 것인가?” 하고, 우승右丞 장여림張汝霖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우승右丞 같은 경우도 석승상石承相(석거石琚)이 추천한 사람이다.” 하였다.
평장정사平章政事 장여림張汝霖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진실로 아는 바가 있으면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적합한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각국이 분열分裂하여 토지가 협소했지만 모두 훌륭한 인재가 있다고 하였으니, 경들이 천거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지금은 짐이 스스로 면려하여 국가의 법치法治를 거의 이룩하였지만, 후일 자손들의 시대에는 누구와 함께 국가를 다스릴 것인가.” 하니, 재신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또 이르기를, 지금 천하는 넓고 사람이 많은데 어찌 인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라 때의 은 모두 절개가 있고 대의大義에 밝은 신하들이었지만 끝내 발탁되어 기용되지 못했으니, 또한 당시에 대신들이 꽉 막혀서 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들은 마땅히 친척과 벗들을 사사로이 돌아보지 않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천거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짐이 장차 그들을 임용할 것이다.” 하였다.
다른 날 또 이르기를, “ 환공桓公은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군주였지만 한 사람의 을 얻어서 마침내 패업을 이루었다. 짐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생각하며 오직 인재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짐은 알지 못하고 경들은 또한 추천하지 않으니, 반드시 완전한 인재를 기다린 뒤에 천거하려 한다면 이는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일에 장점이 있다고 천거한다면, 짐은 또한 재능을 헤아려 기용할 것이다. 짐과 경들은 모두 늙었다. 천하는 지극히 크니 어찌 인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인재를 천거하는 것이 당금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일을 주관할 능력이 있는 인재를 실로 쉽게 얻을 수 없지만, 덕행이 있는 선비가 가장 우수한 것만은 같지 않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完顔襄 : 1140~1202. 金나라 宗室로 본명은 唵이다. 재능과 무예가 출중하여 나이 18세에 世爵을 세습하였다. 世宗 大定年間에 萬戶로서 宋나라 군사를 격파한 뒤에 平章政事에 제수되고 右丞相으로 승진하였다. 후에 南陽郡王으로 봉해지고 司空으로 승진하였다.
역주2 열……법이니 : “열 가구 정도 사는 작은 마을에도 나만큼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이야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라는 孔子의 말에서 차용하여 표현한 말이다.(≪論語≫ 〈公冶長〉)
역주3 顔眞卿 : 唐나라 때의 충신이자 서예가이다. 安祿山의 난 때 平原太守로 있으면서 그 지역을 온전히 지켰고, 의병을 모집하여 토벌하면서 河朔 諸郡의 盟主로 추대되었다. 뒤에 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招諭하러 갔는데, 그의 회유를 듣지 않고 역적이라고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舊唐書≫ 권128 〈顔眞卿列傳〉)
역주4 段秀實 : 唐나라의 명장으로, 자는 成公이다. 德宗 때 朱泚가 반란을 일으켜 長安의 궁성을 점거한 뒤에 司農卿으로 있던 단수실을 불러서 일을 모의를 하자 그의 말을 듣는 척하며 들어가서 일을 의논하다가 얼굴에 침을 뱉고 笏을 들어 이마를 내리치며 크게 꾸짖었다가 나중에 주자에게 피살되었다. 뒤에 덕종이 그 말을 전해 듣고는 그를 대우하여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舊唐書≫ 권128 〈段秀實傳〉)
역주5 管仲 : 춘추시대 齊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이름은 夷吾이다. 鮑叔牙의 추천으로 정치적으로 반대편이었던 桓公에게 발탁되어 卿의 벼슬에 올랐다. 환공을 도와 제도를 개혁하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구분하였으며, 상업과 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타국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하여 환공으로 하여금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고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楚나라를 눌러 제 환공을 春秋五霸의 하나로 만들었다. 저서에 ≪管子≫가 있다. 孔子는 일찍이 관중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오랑캐가 되어 左袵을 하고 散髮하였을 것이다.” 하였다.(≪論語≫ 〈憲問〉)
역주6 (右)[石] : 저본에는 ‘右’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存目叢書本 ≪歷代君鑑≫(明景泰四年內府刊本) 및 ≪金史≫에 의거하여 ‘石’으로 바로잡았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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