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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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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22
○八月 上御左閣하야 讀宋史라가 至趙普說太祖하야 收諸將兵權하야 謂起居注詹同曰 普誠賢相이라 使諸將不早解兵權이면 則宋之天下 未必不五代若也리라
史稱普多忌刻이나 只此一事 功施社稷하고 澤及生民하니 豈可以忌刻少之리오


29-1-22
8월에 태조가 좌각左閣에 행차하여 ≪송사宋史≫를 읽다가, 태조太祖에게 유세하여 여러 장수들의 병권兵權을 거두게 하는 대목에 이르러 기거주起居注 에게 이르기를, “조보는 참으로 어진 재상이다. 만일 여러 장수에게서 조기에 병권兵權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나라의 천하가 반드시 처럼 되었을 것이다.
사서史書에서는 조보에 대해 시기심과 각박한 점이 많았다고 하지만, 다만 이 한 가지 일에서 사직社稷에 시행되고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쳤으니, 어찌 시기심과 각박한 점 때문에 그 을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역주
역주1 趙普 : 922~992. 宋나라의 개국 공신으로, 자는 則平이다. 後周 때 趙匡胤의 막료가 되어 송나라의 개국을 도왔으며, 우간의대부ㆍ병부시랑ㆍ추밀부사 등을 거쳐 964년에 재상이 되었다. 宋 太祖를 도와 李筠과 李重進 등 할거 세력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宿衛나 節鎭 등 권신들의 兵權을 폐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중앙 집권을 강화하여 재정을 안정시키고 북방 정책을 건의하는 등 송나라 초기의 통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야박하고 권력 다툼을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을 음해하였으며, 뇌물을 받고 민가를 강압적으로 사들여 부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태조의 총애를 잃어 태조 만년에 河陽三城節度使로 나갔다. 이후 태조의 아우 太宗이 황위를 가로채는 음모에 가담하여 태종 즉위 후 두 차례 재상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확고해진 후 정사에서 배제되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사후에 魏國公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忠獻이다.
역주2 詹同 : 明나라 徽州付 婺源 사람으로, 초명은 書이고, 자는 同文이다. 태조가 武昌을 함락했을 때 초빙되어 國子博士에 제수되었는데, 관직이 吏部尙書 兼學士承旨에 이르렀다. 宋濂 등과 함께 ≪日曆≫을 편찬하였다. 저서로 ≪天街吟嘯集≫, ≪海岳涓埃集≫ 등이 있다.
역주3 五代十國 : 唐나라가 멸망하고 宋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907년에서 960년까지 70여 년간의 정치적 격변기로, 이 시기에는 화북을 중심으로 한 정통 왕조 계열의 五代, 즉 後梁(907~923), 後唐(923~936), 後晉(936~947), 後漢(947~950), 後周(951~960)와, 화남과 기타 주변 각 지방에서 분립했던 10개국, 즉 吳越, 閩, 荆南, 楚, 吳, 南唐, 南漢, 北漢, 前蜀 및 後蜀이 흥망을 거듭하였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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