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宗之立이 雖由勸進이나 然天命人心之所歸니 雖古聖賢之君이나 亦不能辭也라 蓋自太祖以來로 海內用兵하야 寧歲無幾하고 重以海陵無道하야 賦役繁興하고 盜賊滿野하고 兵甲竝起하야
國內騷然하야 老無留養之丁하고 幼無顧復之愛하야 顚危愁困하야 待盡朝夕이라
世宗은 久典外郡하야 明禍亂之故하고 知吏治之得失하니 及旣卽位에 好賢納諫하고 尙文抑武하며 南北講好하야 與民休息이라
於是에 躬節儉崇孝弟信賞罰重農桑하며 愼守令之選하고 嚴廉察之責하야 孜孜爲治하야 夜以繼日하니 可謂得爲君之道矣라
當此之時하야 群臣守職하야 上下相安하고 家給人足하야 倉廩有餘하고 刑部斷死罪가 歲或十七人或二十人하니 號稱小堯舜이 豈虛語哉리오
然擧賢之急과 求言之切이 不絶乎訓辭나 而群臣偸安苟祿하야 不能將順其美하야 以厎大順也하니 噫라
“세종의 즉위가 비록 사람들의 추대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지만,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귀의하는 바가 되었으니, 비록 고대古代의 성스럽고 훌륭한 군주라 하더라도 또한 사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태조太祖 이래로 천하가 전쟁을 일으켜서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해릉海陵이 무도하여 부세와 노역이 번거롭게 일어나고 도적이 들에 가득하고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져서 늙은이에게는 머무르며 봉양하는 장성한 자식이 없고 어린아이에게는 보살피며 양육하는 은혜로운 부모가 없어서 위급하고 곤궁해져서 아침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세종은 오랫동안 지방의 고을을 다스렸기 때문에 화란禍亂의 원인을 잘 알고 이치吏治의 득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즉위했을 때에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며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력을 억누르며 남북으로 우호를 강화講和하여 백성들과 함께 안녕을 누렸다.
이에 몸소 절검節儉하고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며 상벌賞罰을 미덥게 하고 농업과 양잠을 중시하였으며 수령의 선발을 신중히 하고 감찰의 책임을 엄격히 하여 부지런히 국가를 다스려서 밤낮없이 국정國政에 힘을 쏟았으니, 군주로서의 도리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당시에 신하들은 삼가 직분職分을 지켜 상하上下가 서로 편안하였고 집집마다 풍족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창름倉廩에는 남은 곡식이 있었으며 형부刑部에서는 사형을 판결하는 것이 매년 17명이나 28명뿐이었으니, ‘소요순小堯舜’이라는 칭송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그러나 훌륭한 인재를 임용하려는 급한 생각과
충언忠言을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훈시訓示하는 내용 가운데 끊임없이 드러나 있었지만, 여러 신하들이 편안하게 지내기를 추구하고 구차하게 녹봉을 취하기만 할 뿐, 그 아름다운
정사政事에 순응하여
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