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三年夏四月에 殂하니 在位二十三年이요 享年三十二라
魏主幼有至性하야 年四歲時에 獻文患癰하니 親爲之吮膿이라 撫念諸弟하야 始終曾無纖介하고 惇睦九族하야 禮敬殊深이라
聽覽政事에 從善如流하고 哀矜百姓하야 恒思所以濟益이라
天地五郊宗廟二分之禮는 常必躬親하야 不以寒暑爲倦하고 尙書奏案은 多自尋省하고 百官大小를 無不留心하야 務於周洽하더라
常從容謂史官曰 直書時事하야 無諱國惡하라 人君威福自己에 史復不書면 將何所懼리오
凡有修造면 不得已而爲之하고 不爲不急之事에 重損人力하고 有禁忌禳厭之方非典籍所載者는 一皆除罷하라
雅好讀書하야 手不釋卷하니 五經之義를 覽之便講하고 好爲文章하야 詩賦銘頌을 在興而作하며 有大文筆에 馬上口授라도 及其成也에 不改一字라
自太和十年以後로 詔冊을 皆親爲之라 自餘文章百有餘篇이라 性儉素하야 常服澣濯之衣하고 鞍勒鐵木而已니 其雅志皆此類也러라
15-1-23 태화太和 23년(495) 여름 4월에 위주魏主가 세상을 떠나니, 재위 기간이 23년이었고 향년이 32세였다.
위주魏主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4세 때 헌문제獻文帝가 악창을 앓자 직접 종기를 빨았다. 아우들을 잘 보살펴서 시종 조그만 흠도 없었고, 구족九族과 돈목惇睦하여 예경禮敬이 극진하였다.
정사政事를 듣고 보살핌에 물 흐르듯이 선善을 따랐고 백성百姓을 애처롭고 불쌍히 여겨 늘 구제하고 유익하게 해줄 방법을 생각하였다.
천지天地와
및
종묘宗廟와
춘분春分․
추분秋分에 지내는
전례典禮는 항상 반드시 직접 주관하여 추위와 더위 때문에 게을리하지 않았고,
상서尙書의
주안奏案은 대부분 직접 찾아 살폈으며,
문무백관文武百官과
대소신료大小臣僚들에 대해 유념하지 않음이 없어서 두루 흡족하게 여기도록 힘썼다.
늘 조용히 사관史官에게 이르기를, “시사時事를 정직하게 기록하여 나라의 수치스러운 일도 꺼리지 말라. 인군人君이 상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데 사관史官이 다시 기록하지 않으면 장차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무릇 수조修造할 일이 있으면 부득이不得已할 때 시행하고 거듭 인력人力에 손실을 끼치는 급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으며, 전적典籍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여러 가지 재앙을 떨치는 등의 금기禁忌하는 방술方術이 있으면 일체 모두 제거하여 혁파하였다.
평소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오경五經의 의리에 대해 볼 때마다 그 뜻을 강론하였다. 문장 짓기를 좋아하여 시詩․부賦․명銘․송頌 등을 흥興이 일면 지었고, 중요한 글을 지을 일이 있을 때는 말 위에서 입으로 불러주어도 그 글이 완성되었을 때 한 자도 고칠 글자가 없었다.
태화太和 10년(486) 이후부터는
조책詔冊을 모두 직접 작성하였다. 기타 나머지
문장文章이 100여 편이 남아 있다. 성품이
검소儉素하여 항상
안장과 재갈 등의
마구馬具는 철과 나무로 만들 뿐이었으니, 그 평소의 뜻이 모두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