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之爲太子也에 受尙書於汝南張酺러니 至是東巡에 酺爲東郡太守라
帝幸東郡하야 引酺及門生 幷郡縣掾史하야 竝會庭中하고 使酺講尙書一篇然後에 修君臣之禮하니 賞賜殊特하야 莫不沾洽이라
行過任城할새 幸鄭均舍하야 賜尙書祿하야 以終其身하다
三月에 幸魯하야 祠孔子及七十子於闕里하고 作六代之樂하고 大會孔氏男子二十以上者六十人하야 帝謂孔僖曰 今日之會가 寧於卿宗에 有光榮乎아
對曰 臣聞明王聖主는 莫不尊師貴道라하니 今陛下親屈萬乘하사 辱臨敝里하시니 此乃崇禮先師하야 增輝聖德이니 至於光榮은 非所敢承이로소이다
帝大笑曰 非聖者子孫이면 焉有斯言乎아하고 拜僖郞中하다
帝幸東平하야 追念獻王하야 謂其諸子曰 思其人하야 至其鄕하니 其處在호되 其人亡이라하고 因泣下沾巾하고 遂幸獻王陵하야 以大牢로 親拜祠하고 坐哭泣盡哀하다
獻王之歸國也에 驃騎府吏丁牧周栩는 以獻王愛賢下士로 不忍去之하야 遂爲王家大夫하야 數十年에 事祖及孫하니
帝聞之하고 皆引見하고 旣愍其淹滯하고 且欲揚獻王德美하야 卽皆擢爲議郞하다
11-2-11 장제가 태자로 있을 때
여남汝南 사람
에게 ≪
상서尙書≫를 수학하였는데, 이해 동쪽 지역을 순시할 때에
장포張酺를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삼았다.
장제는 동군에 행차하여 장포와 문생門生 및 군현郡縣의 연사掾史를 불러 모두 군정郡庭에 모이게 하고 장포로 하여금 ≪상서≫ 한 편篇을 강講하게 한 다음 군신君臣의 예禮를 행하였으니, 상사賞賜가 매우 특별하여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임성任城을 지날 때는 정균鄭均의 집에 행차하여 만나보고 그에게 종신終身토록 상서尙書의 녹祿을 주게 하였다.
3월에
노魯나라에 행차하여
궐리闕里에서
공자孔子 및 72제자에게 제사 지내고
을 연주한 다음 20세 이상의
공씨孔氏 남자男子 60명을 크게 모아놓고 장제가
공희孔僖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모임이 어찌
경卿의
종족宗族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공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들으니 명왕明王과 성주聖主는 스승을 높이고 도道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陛下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저희 마을에 왕림하셨으니, 이는 바로 선사先師를 존숭하고 예우하여 성덕聖德을 더욱 빛나게 하신 것으로, 신의 집안이 사사로이 받들 수 있는 광영光榮이 아닙니다.” 하니,
장제가 크게 웃으며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자손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은 말을 하겠는가.” 하고 공희를 낭중郞中에 제수하였다.
장제는 동평東平에 행차하였을 때 동평헌왕東平獻王(유창劉蒼)을 추념追念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 사람을 생각하여 그 고을에 이르니, 그 사람이 거처하던 곳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사람은 없구나.” 하고, 인하여 눈물로 수건을 적시고는 마침내 동평헌왕의 능陵으로 가서 태뢰太牢로 친히 제사를 지낸 다음 앉아서 곡哭하고 눈물 흘리며 슬픔을 다하였다.
동평헌왕이 봉국封國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있던 시절〉 보좌하던 아전인 정목丁牧와 주허周栩는 동평헌왕이 어진 이를 사랑하고 선비에게 낮추었던 일 때문에 차마 떠나지 못하여 마침내 왕가王家의 대부大夫로 삼고 수십 년 동안 조祖(유창劉蒼)․손孫(유창劉敞)을 섬겼다.
장제가 이 말을 듣고 모두 불러 만나보고 오랫동안 승차하지 못한 것을 위로한 다음 또 동평헌왕의 아름다운 덕德을 선양宣揚하고자 바로 두 사람을 발탁하여 의랑議郞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