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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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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8
漢臣賈誼論曰
秦以區區之地 致萬乘之權하고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然後 以六合爲家하고 殽函爲宮이러니 一夫作難 而七廟墮하고 身死人手하야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하고 而攻守之勢異也
宋儒胡寅曰
攻守無異勢 秦以詐力得之하니 豈有施仁義之理耶


37-2-8
나라 신하 가 논하였다.
나라가 좁은 땅을 가지고 만승萬乘의 권세를 이룩하고 8를 불러들여 동렬同列의 제후들의 조회를 받기를 100여 년을 한 뒤에 천하를 집으로 삼고 으로 삼았는데, 한 사람이 난을 일으키자 가 무너지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고 공격하여 빼앗을 때와 그것을 지킬 때의 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
나라 학자 이 말하였다.
“공격하여 빼앗을 때와 그것을 지키는데 다른 형세가 없다. 나라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얻었으니 어찌 인의仁義를 베풀 이치가 있겠는가.”


역주
역주1 賈誼 : B.C. 200~B.C. 168. 前漢 洛陽 사람으로, 廷尉 吳公의 천거로 文帝의 부름을 받아 博士에 제수되고, 한 해 만에 太中大夫에 올랐다.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논하다 周勃과 灌嬰 등의 비방을 받아 長沙王의 太傅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 梁懷王의 태부로 임명되었다. 당시에 흉노가 변방을 침략하고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들을 제어할 방책으로 제후왕을 많이 봉하여 제후왕의 힘을 약화하고 흉노에 대한 강경책을 쓸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상소에서 건의하는 내용을 통곡할 만한 일[可爲痛哭者] 한 가지, 눈물 흘릴 만한 일[可爲流涕者] 두 가지, 길게 탄식할 만한 일[可爲長太息者]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아뢰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문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양회왕이 낙마하여 急逝하자, 죄책감으로 지나치게 애도한 나머지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儒家的 民本思想에 입각한 정치사상을 담은 책 ≪新書≫를 저술하였다.(≪漢書≫ 권48 〈賈誼列傳〉)
역주2 崤函 : 崤山과 函谷關의 병칭으로, 모두 秦나라 수도인 咸陽을 지키는 요충지이다. 張衡의 〈西京賦〉에 “漢나라의 처음 도읍지는 위수 가에 있었고, 진나라의 도읍지는 그 북쪽에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함양이다. 동쪽으로는 효산과 함곡관의 험고함과 도림의 요새가 있다.[漢氏初都 在渭之涘 秦里其朔 寔爲咸陽 左有崤函重險 桃林之塞]”라고 하였다.(≪文選≫ 권2)
역주3 七廟 : 天子의 宗廟를 가리킨다. 현임 황제를 기준으로 위로 4대의 황제와 不遷廟와 始祖廟를 합쳐 7神位를 각각 사당을 지어 모시고, 親盡이 되면 시조묘로 祧遷하여 항상 七廟를 유지한다. 諸侯는 五廟, 大夫는 三廟, 士는 一廟이다.(≪禮記集說≫ 권30 〈王制〉)
역주4 胡寅 : 1098~1156. 宋나라의 학자로 자는 明仲이다. 建寧 崇安 사람으로 胡安國의 동생 胡淳의 아들이다. 徽宗 宣和 3년(1121)에 進士가 되어 秘書省 校書郞을 제수 받았으며, 楊時에게 학문을 전수받았다. 金나라가 남침을 해오자 高宗에게 上書하여 군사를 일으켜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주화파였던 秦檜에 의해 衡州로 귀양갔다가 다시 진회의 무고로 新州로 갔으나 진회가 죽고 나서 복관되었다. 학자들에게 致堂先生으로 불렸으며, 관직은 禮部侍郎 兼 侍講, 徽猷閣直學士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文忠이며, 저서로는 ≪論語詳說≫, ≪讀史管見≫, ≪斐然集≫ 등이 있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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