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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2)

역대군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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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6
史臣贊曰
世宗在藩 多務韜晦러니 及卽位하야 破高平之冦하니 人始服其英武 其御軍 號令嚴明하야 人莫敢犯하고 攻城對敵 矢石落其左右하야 人皆失色이로되 而略不動容하고 應機决策 出人意表하다
又勤於爲治하야 百司簿籍 過目無所忘하고 發奸擿伏 聦察如神하다 閒暇則召儒者讀前史하야大義하고 性不好絲竹珍玩之物하다
甞言太祖養成王峻王殷之惡하야 致君臣之分不終이라하야 故群臣有過 則面質責之하야 服則赦之하고 有功則厚賞之하고 文武參用하야 各盡其能하니 人無不畏其明而懷其惠 故能破敵廣地하야 所向無前이라
然用法太嚴하야 群臣職事小有不擧 往往置之極刑하야 雖素有才幹聲名이라도 亦無所開宥하고 尋亦悔之하고 末年寖寬하니 登遐之日 遠邇哀慕焉이러라


19-1-26
사신史臣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세종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에 자기의 재능을 숨기려고 많이 힘썼는데, 즉위하여 고평高平의 외적을 격파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영무英武함에 심복하였다. 그가 군대를 통솔할 때에는 호령이 엄명嚴明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고, 을 공격하고 적과 싸울 때에는 시석矢石이 좌우에 떨어져 사람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계책을 결정하는 것이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또 정치를 하는 데에 부지런하여 백사百司의 장부를 한 번 보면 잊는 법이 없고, 간계를 밝히고 숨겨진 것을 적발하는 데에 귀신처럼 밝게 살폈다. 한가한 때에는 학자를 불러서 전대의 역사를 읽으며 대의大義를 의논하였고, 천성이 음악이나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태조가 의 악을 키워서 군신君臣 간의 분수가 잘 마무리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잘못을 하면 면전에서 꾸짖어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해주고 공이 있으면 후한 상을 주었으며, 문관과 무관을 섞어 등용하여 각각 자기 능력을 다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밝음을 두려워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을 격파하고 땅을 넓혀서 그가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 것이 너무 엄하여 신하들이 직책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왕왕 극형에 처해서 평소 재능과 명성이 있는 자라도 용서가 없다가 뒤이어 후회하였고, 말년에는 점차 관대해졌으니, 세상을 떠나자 원근의 사람들이 슬퍼하고 흠모하였다.”


역주
역주1 王峻 : ?~953. 五代 때 相州 安陽 사람으로, 자는 秀峰이다. 後梁, 後漢에서 벼슬하였고, 後周 때에 樞密使로서 재상을 겸하였다. 그러나 佐命의 공이 있다고 자부하여 임금에게 불손하다가 商州司馬로 좌천되어 죽었다.
역주2 王殷 : ?~954. 五代 때 大名 사람이다. 後唐, 後晉, 後漢에서 벼슬하였고, 後周 태조 때에 天雄軍節度使가 되어 親兵을 통솔하였다. 王峻이 좌천되자 왕은이 불안해하니 태조가 그를 의심하여 죽였다.
역주3 : ≪資治通鑑≫, ≪通鑑總類≫에는 판본에 따라 ‘榷’, ‘搉’으로 되어 있다. 뜻은 모두 동일하다.

역대군감(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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