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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3)

역대군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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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9
○二月 上御東閣하니 翰林學士宋濂待制王禕等 進講大學傳之十章하니
至有土有人하야 濂等反覆言之한대 上曰 人者 國之本이요 德者 身之本이니 德厚則人懷하고 人安則國固
故人主有仁厚之德이면 則人歸之 如就父母하리니 人心旣歸 有土有財 自然之理也 若德不足以懷衆이면 雖有財 亦何用哉리오


30-1-9
2월이 태조가 동각東閣에 임어하니 한림학사翰林學士 대제待制 등이 ≪대학大學10을 진강하였다.
“토지가 있고 인민이 있다.”에 이르러 송렴 등이 반복해서 말하자 태조가 이르기를,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고, 덕은 몸의 근본이니, 덕이 두터우면 인민이 귀의하고, 인민이 편안하면 나라가 견고해진다.
그러므로 임금이 인후仁厚한 덕이 있으면 인민이 귀의하기를 부모에게 나아가는 것처럼 할 것이니, 인민의 마음이 귀의하면 토지가 있고 재물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만약 덕이 백성을 귀의시키기에 부족하면 재물이 있더라도 어떻게 쓰겠는가.” 하였다.
송염宋濂 왕의王禕송염宋濂 왕의王禕


역주
역주1 宋濂 : 1310~1381. 명나라 때의 문인․정치가로 자는 景濂이고, 호는 潛溪이다. 원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龍門山에 은거하면서 저작에 종사하여, ≪宋學士全集≫ 42권과 ≪篇學類纂≫, ≪龍門子≫ 등의 저서를 남겼다. 명나라 태조가 세력을 잡은 뒤 부름을 받고 남경에 가서 왕세자의 스승이 되고, 이후 태조의 고문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71세 때 그의 손자의 죄에 연좌되어 사천성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병사했다. 전기 작품 외에 〈閱江樓記〉와 작품집 ≪宋文憲公全集≫ 53권 등이 있다.(≪明史≫ 권128 〈宋濂列傳〉)
역주2 王禕 : 1322~1373.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 인물로 자는 子充이다. 원나라 말기에 은거했다가 朱元璋의 부름을 받고 나와 江南儒學提擧, 南康府同知를 지냈다. 洪武 초에 宋濂과 함께 ≪元史≫를 수찬하고, 翰林待制에 발탁되었다. 저서에 ≪大事記續編≫, ≪重修革象新書≫, ≪王文忠公集≫이 있다.

역대군감(3)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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