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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君鑑(1)

역대군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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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군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鄧禹自馮愔叛後 威名稍損하고 又乏糧食하야 戰數不利하니 歸附者日益離散이러라
赤眉延岑暴亂三輔하고 郡縣大姓 各擁兵衆하야 禹不能定이어늘
帝乃遣偏將馮異하야 代禹討之할새 車駕送至河南하야 勑異曰 三輔遭王莾更始之亂하고 重以赤眉延岑之醜하야 元元塗炭하야 無所依訴
將軍 今奉辭하야 討諸不軌하니 營堡降者 遣其渠帥하야 詣京師하고 散其小民하야 令就農桑하고 壞其營壁하야 無使復聚하라
征伐 非必略地屠城이라 要在平定安集之耳 諸將 非不徤闘 然好虜掠이라
本能御吏士하니 念自修勑하야 無爲郡縣所苦하라
異頓首受命하고 引而西하야 所至 布威信하니 群盜多降이러라


10-1-9 이 배반한 뒤로 위엄과 명망이 차츰 떨어지고 또 양식이 부족하여 싸움에서 자주 승리하지 못하였으니, 귀부歸附했던 자들이 날로 더욱 이산離散하였다.
적미군赤眉軍의 군대가 지방에서 행패를 부리며 어지럽히고 군현郡縣의 큰 성씨姓氏들이 각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등우가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이에 편장군偏將軍 를 파견하여 등우를 대신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당시 거가車駕가 친히 전송하여 하남河南에 이르러 풍이에게 칙명하기를 “삼보三輔 지방은 왕망王莽경시更始의 난리를 만나고 적미赤眉연잠延岑의 혹독함까지 겹쳐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의지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다.
장군이 이제 황제의 사명辭命을 받들어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게 되었으니, 삼보 지방의 영보營堡 중에 항복하는 자들은 그 우두머리를 보내어 경사京師에 오게 하고, 그 백성들을 해산하여 농사짓고 뽕나무를 가꾸게 하며, 그 영벽營壁을 파괴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게 하라.
정벌征伐은 굳이 땅을 경략經略하고 도륙屠戮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점이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데에 있을 뿐이다. 제장諸將들은 용감히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은 본래 관리와 군사들을 잘 제어하니, 생각건대 스스로를 닦고 신칙하여 군현郡縣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풍이가 머리를 조아리고 명령을 받고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위엄과 신의를 베푸니, 여러 도적들이 대부분 항복하였다.


역주
역주1 鄧禹 : 光武帝의 중흥을 도운 최고 功臣 중의 한 사람으로, 광무제 즉위 후에 大司徒에 임명되고 高密侯에 봉해졌다.
역주2 馮愔 : 鄧禹의 部將이다. 등우가 上郡을 공격할 때에 馮愔과 宗歆이 栒邑을 지키고 있었는데 권세를 다투어 서로 공격하여 풍음이 마침내 종흠을 죽이고는 배반하여 등우를 공격하니,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풍음의 친구인 黃防을 보내어 포박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역주3 延岑 : 後漢 南陽 사람으로 자는 叔牙이다. 光武帝 建武 초에 漢中에 있으면서 武安王이라 자칭했다가, 馮異에게 패배하자 秦豐에 투항했다. 나중에 公孫述에게 항복하여 大司馬가 되고, 汝寧王에 봉해졌다. 建武 12년(36) 공손술에게 권해 출병하여 漢將 吳漢을 습격하라고 하였는데, 공손술이 패해 죽자 한나라에 항복한 뒤 피살되었다.
역주4 三輔 : 漢나라 때 首都인 長安을 중심으로 인접지를 京兆․馮翊․扶風으로 세 구역으로 나누어 三輔라 하였다.
역주5 馮異 : 光武帝 때의 장수로, 赤眉를 崤底에서 크게 격파하여 남녀 8만 명의 항복을 받고 나머지 10여만 명이 나중에 항복해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광무제가 璽書를 내려 그 노고를 치하하기를 “처음에는 실패하였으나 나중에는 공을 거두었으니 논공행상하여 큰 공훈에 보답하겠다.”라고 하였다.(≪後漢書≫ 권17 〈馮異列傳〉)

역대군감(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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