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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集解(1)

한비자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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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집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129 君所知也니이다 人之情 莫不愛其子어늘 今蒸其子以爲膳於君하니 其子弗愛어늘 又安能愛君乎잇가
公曰 然則孰可 管仲曰 하니 其爲人也 堅中而廉外하고 少欲而多信하니이다
夫堅中이면 則足以爲表 廉外 則可以大任이요 少欲이면 則能臨其衆이요 多信이면 則能親隣國이니이다
此霸者之佐也 君其用之하소서 君曰 諾 居一年餘 管仲死하니 君遂不用隰朋而與竪刁하다
刁涖事三年 桓公南遊堂阜러니 竪刁率易牙衛公子開方及大臣爲亂하다
桓公渴餒而하야 身死三月不收하니 蟲出于戶하니라
○先愼曰 二柄篇難一篇 戶作尸하니


임금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일반적인 인정은 자기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지금 역아는 자기의 자식을 삶아 음식을 만들어 임금님께 바쳤으니, 자기의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데 또 어찌 임금님을 사랑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환공이 “그렇다면 누가 좋겠소?” 하고 물었다. 관중은 “습붕隰朋이 될 만합니다. 그는 사람됨이 의지意志는 굳세고 행실行實은 청렴하며 사욕私欲이 적고 성신誠信함이 많습니다.
의지가 굳세면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행실이 청렴하면 대임大任을 담당할 만하고 사욕이 적으면 민중民衆을 잘 다스릴 수 있고 성실함이 많으면 이웃 나라와 친밀하게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패자霸者의 보좌감이니 임금님께서는 그를 임용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환공이 “좋다”라고 하였다. 1년 남짓 지난 뒤에 관중이 죽으니, 환공은 마침내 습붕을 임용하지 않고 수조豎刁를 임용하여 그 자리를 주었다.
수조가 정사政事를 맡은 지 3년 만에 환공이 남쪽 당부堂阜에 가서 유람하고 있었는데 수조가 역아와 위나라 공자 개방 및 대신大臣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이 목이 마르고 굶주린 상태로 남문 침전南門 寢殿의 공을 가두어둔 방에서 죽었고, 죽은 지 3개월이 되도록 시신을 거두지 않아서 구더기가 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왕선신王先愼:≪한비자韓非子≫ 〈이병편二柄篇〉과 〈난일편難一篇〉에 ‘’자가 ‘’자로 되어 있으니 오자이다.


역주
역주1 隰(습)朋 : 춘추시대 齊나라의 公族으로, 桓公 때 大夫가 되어 管仲을 도와 환공이 霸業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成子이다.
역주2 死南門之寢公守之室 : ≪呂氏春秋≫ 〈知接篇〉에는 “裳衣袂而絶乎壽宮(옷소매를 덮어쓰고 수궁에서 절명하였다.)”로 되어 있고, 高誘의 注에 “壽宮 寢堂(수궁은 침당이다.)”이라 하였다. 陳奇猷는 ≪韓非子新校注≫에서 “이 기록에 의거하면 ≪韓非子≫의 이 문구 ‘公守’는 응당 ‘壽宮’이 되어야 한다. 곧 ‘壽宮’의 성음이 잘못 ‘守公’이 되고, 뒷사람이 또 도치하여 ‘公守’로 만들었다.” 하였다. 역자는 이를 따르지 않고 저본대로 번역한 다음 참고로 이 설을 각주로 두었다.

한비자집해(1) 책은 2019.10.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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