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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集解(1)

한비자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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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집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0 其하야 皆以言死하니이다
○盧文弨曰 策 無此下二十字 引作頡하고 說文 直項也라하니 頓字 無理
孫詒讓曰 頓首 疑作頓足이니 下文頓足徒裼 犯白刃 蹈鑪炭 斷死於前者 皆是也 正與此文相應하니 是其證이라
曰 文選羽獵賦 之倫 蒙盾負羽라하고 後漢賈復傳 被羽先登이라하니 謂繫鳥羽爲標識也
與負被 其義一耳 當爲干이니 形近致誤 犯也 不至干人 皆以言死 謂未至犯敵人時 皆言必死
先愼曰 頓首 當依策注作頡首 猶言抗首也 頓足亦通이나 然與戴羽 文義不貫이라


그러나 머리칼을 정리하여 깃을 꽂은 장군이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전진하는 자가 천 명에 그치지 않아 모두 죽기로 싸우겠다 말합니다.
노문초盧文弨:≪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는 이 아래의 20가 없다. ‘’은 ≪전국책보주戰國策補注≫에 인용한 글이 ‘’로 되어 있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은 목을 곧게 세움이다.” 하였으니, ‘’자는 의의意義가 없다.
손이양孫詒讓:‘돈수頓首’는 아마도 ‘돈족頓足’이 되어야 될 듯하니, 아래 ‘돈족도석 범백인頓足徒裼 犯白刃 도로탄 단사어전자蹈鑪炭 斷死於前者 개시야皆是也’의 문장이 바로 이 문장과 상응하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왕선겸王先謙:≪문선文選≫ 〈우렵부羽獵賦〉에 “맹분孟賁하육夏育의 무리가 방패를 머리에 덮고 깃털을 등에 꽂았다.”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가복전賈復傳〉에 “깃털로 만든 깃발을 등에 꽂고 먼저 에 올랐다.” 하였으니, 새의 깃털을 꽂아 표지標識로 삼은 것을 이른다.
’는 와 같은 뜻이다. ‘’은 응당 ‘’이 되어야 하니,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여 틀리게 된 것이다. ‘’은 ‘(부딪치다)’이니, ‘부지간인 개이언사不至干人 皆以言死’는 적과 부딪치지 않았을 때에 모두 반드시 목숨 바쳐 싸우겠다고 말함을 이른다.
왕선신王先愼:‘돈수頓首’는 응당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의 에 의거하여 ‘힐수頡首’가 되어야 하니, 머리를 꼿꼿이 든다는 말과 같다. ‘돈족頓足(발로 땅을 구르다)’도 뜻이 통하기는 하지만, ‘대우戴羽(새의 깃을 꽂는다)’와 의미가 연관되지 않는다.


역주
역주1 頓首戴羽……不至千人 : ‘頓首’를 尹東陽은 “절할 때 머리를 땅에 닿는 것이 돈수이니, 이를 차용하여 땅에 엎드려 명령을 듣는다는 말로 썼다.” 하였고, 陳奇猷의 ≪韓非子新校注≫에는 “頓은 정리함이니, ‘整首戴羽’는 옛사람은 長髮이어서 머리에 새의 깃을 꽂기 위해서는 먼저 머리칼을 매만져 정리해야 한다.”라 하였다. ‘斷死’를 高亨은 “‘斷’은 ‘必’과 같으니 難에 달려가 반드시 죽기로 맹세하는 것이 ‘斷死’다.”라 하였다. 고형은 또 “‘至’는 ‘止’이니 ‘군대가 수십만에서 백만이다.’라고 떠벌렸다면 장군이 된 자는 반드시 천 명을 넘었을 것이기 때문에 ‘천 명에 그치지 않았다.’ 말한 것이다.”라 하였다. 이런 주장을 진기유도 옳다고 여겼기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2 國策補注 : ≪戰國策補注≫를 말한다. 吳師道가 지었다. 앞의 역주5) 참조.
역주3 王先謙 : 1842~1917. 淸末의 經學家․訓詁學者이다. 同治 연간(1863~1874)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曾國藩에게 師事하여 당시 學界의 泰斗로 칭송받았고 國子監 祭酒를 역임하였다. ≪續皇淸經解≫․≪十朝東華錄≫․≪續古文辭類纂≫ 등을 編刊하였고, 저서에 ≪漢書補注≫․≪水經注合箋≫․≪後漢書集解≫․≪荀子集解≫․≪莊子集解≫․≪詩三家義集疏≫․≪虛受堂詩文集≫ 등이 있다.
역주4 賁育 : 孟賁과 夏育의 합칭이다. 孟賁은 전국시대 秦 武王 때의 勇士이고, 夏育은 춘추시대 衛나라의 용사이다.

한비자집해(1) 책은 2019.10.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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