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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集解(4)

한비자집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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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9 或曰 叔向師曠之對 皆偏辭也 夫一匡天下하야 九合諸侯 美之大者也 非專君之力也 又非專臣之力也니라
昔者 在虞하고 在曹 二臣之智 言中事하고 發中功이로되 虞曹俱亡者 何也 此有其臣而無其君者也니라
處干而干亡하고
○先愼曰 拾補 干作盂 盧文弨云 藏本張本同하고 或改作虞
顧廣圻云 今本 干作于하니 下同이나 按此未詳이라
兪樾云 干 卽虞也 莊子刻意篇 夫有干越之劍이라하야늘 釋文 引司馬云 干 吳也라하고 荀子勸學篇 干越夷貉之子라하야늘 楊倞注 干越 猶言吳越이라하고 淮南子原道篇 干越生葛絺라하야늘 高誘注 亦云 干 吳也라하니 是吳有干名이요 而虞與吳古同聲而通用이라
桓十年左傳正義云 云 虞 姬姓也 武王克商하고 封虞仲之하야 以爲虞仲之後하야 處中國爲하니 後世謂之虞公이라하니라
然則虞之始封 本爲西吳 葢以別於어늘 因春秋經傳 皆作虞而西吳之名廢矣
漢書地理志 河東郡大陽 吳山在西하고 上有吳城이라 周武王封太伯後於此하니 是爲虞公이라하니라 夫虞之故城 謂之吳城이라하니 是虞卽吳也
吳得稱干이면 則虞亦得稱干也 蹇叔處干 卽處虞也 先愼按 兪說是
今本作于 形近而誤 或作虞者 不知干卽虞而改爲虞也


혹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숙향叔向사광師曠이 대답한 말은 모두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한번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고, 제후諸侯를 규합한 일은 좋은 업적 중에 가장 큰 업적이니, 오로지 군주君主의 능력에 의한 것만도 아니며, 오로지 신하의 능력에 의한 것만도 아니다.
예전에 궁지기宮之奇나라에 있고, 희부기僖負羈나라에 있을 적에 두 신하의 지혜는 〈예측한〉 말은 일에 적중하고, 시행한 일은 성공成功하였으나 나라와 나라가 모두 멸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신하의 능력은 있었으나 군주君主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숙蹇叔나라에 있을 적엔 나라가 멸망하였고,
왕선신王先愼:≪군서습보群書拾補≫에 ‘’이 ‘’로 되어 있다. 노문초盧文弨는 “장본藏本장본張本은 같고, 어떤 은 고쳐서 ‘’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고광기顧廣圻는 “금본今本에 ‘’이 ‘’로 되어 있으니 아래도 같으나, 살펴보건대 이것은 미상이다.”라고 하였다.
유월兪樾은 “‘’은 곧 ‘’이니, ≪장자莊子≫ 〈각의편刻意篇〉에 ‘부유간월지검夫有干越之劍(오월吳越의 명검을 가지고 있음)’이라 하였는데,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에 ‘사마司馬가 「이다.」라고 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였고,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에 ‘간월干越이맥夷貉(오랑캐)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는데, 양경楊倞에 ‘간월干越오월吳越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편原道篇〉에 ‘간월干越에서 고운 갈포를 생산한다.’라고 하였는데, 고유高誘에도 ‘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에 ‘’의 이름이 있는 것이고, ‘’와 ‘’는 예전에 이 같고 통용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환공桓公 10년의 공영달孔穎達정의正義에 ‘〈세족보世族譜〉에 나라는 희성姬姓이다. 무왕武王나라를 이기고 우중虞仲서손庶孫을 봉하여 우중의 후사後嗣로 삼아서 중원中原에 살게 하고 서오西吳라고 하였으니, 후세後世우공虞公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라가 처음 봉해진 것은 본디 서오가 되니, 형만荊蠻나라와 구별했던 것인데 ≪춘추春秋≫의 에서 모두 로 써서 서오의 명칭이 폐기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하동군河東郡 대양大陽오산吳山이 서쪽에 있고 그 위에 오성吳城이 있다. 무왕武王태백太伯의 후예를 이곳에 봉하였으니, 이 사람이 우공虞公이다.’라고 하였다. 나라의 옛 성을 오성吳城이라고 하였으니, 이곳의 가 곧 이다.
’를 ‘’이라고 일컬었다면 ‘’도 ‘’이라고 일컬을 것이니, 건숙蹇叔이 ‘’에 산 것은 곧 ‘’에 산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유월兪樾의 말이 옳다.
금본今本에 ‘’로 된 것은 자형字形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고, 어떤 본에 ‘’로 된 것은 ‘’이 곧 ‘’인 줄을 몰라서 ‘’로 고친 것이다.


역주
역주1 宮之奇 : 春秋時代 虞나라의 大夫이다. 晉 獻公이 虞君에게 虢나라를 치러 갈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우군에게 빌려주면 안 된다고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가족을 데리고 曹나라로 망명하였다. 그 석 달 뒤에 虢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가던 晉軍에게 虞나라도 망하였다.
역주2 僖負羈 : 春秋時代 曹나라의 大夫이다. 晉 文公 重耳가 유랑생활을 하면서 曹나라를 지나갈 때 曹 共公이 무례하게 굴었으나 僖負羈는 아내의 혜안에 힘입어 문공을 잘 대접하였다. 후일 晉나라가 曹나라를 토벌할 때 군대에 명령을 내려 희부기의 집안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역주3 蹇叔 : 春秋時代 晉나라의 大夫이다. 百里奚의 천거로 등용되어 백리해와 함께 秦 穆公을 보좌하여 霸業을 이루게 하였다. 목공이 鄭나라를 침공하려고 하자 승리할 수 없는 형세에 의거하여 直諫하였으나 목공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결국 晉나라의 全軍이 전멸하는 大敗를 당하였다.
역주4 : 晉나라 杜預가 지은 ≪春秋釋例≫ 중의 〈世族譜〉를 말한다.
역주5 庶孫 : 周나라의 禮制에 祖父의 뒤를 이을 嫡子가 살아 있을 경우, 그 적자의 長子는 嫡孫이라 하지 않고 庶子라고 하였다.
역주6 西吳 : 지금의 山西省 平陸縣 지역에 있었던 虞나라의 別稱이다. 周 武王이 商나라를 정복한 뒤에 古公亶父(보)의 아들 虞仲의 손자를 이곳에 封하고 西虞라 하여 泰伯을 봉한 吳나라와 구별하였다. ‘虞’는 ‘吳’의 통용자이다.
역주7 荊蠻之吳 : 周 太王의 아들 泰伯을 봉한 吳나라를 이른다. ‘荊蠻’은 中原 사람이 楚․越이나 남쪽 사람을 얕잡아 이르던 말로, 吳나라가 지금의 江蘇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일컫던 말이다.

한비자집해(4)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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