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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集解(1)

한비자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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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藝文志法家] 韓子五十五篇注+ 韓諸公子 使秦 李斯害而殺之하다이라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법가法家:≪한자韓子≫ 55이다.注+이름은 이니, 나라 여러 공자公子 중의 한 사람이다.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이사李斯가 그를 모해하여 죽였다.
[隋書經籍志子部法家] 韓子二十卷 目一卷注+韓非撰이라이라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자부 법가子部 法家:≪한자韓子≫ 20권, 목록 1권이다.注+한비韓非가 지었다.
[舊唐書經籍志丙部子錄法家] 韓子二十卷注+韓非撰이라이라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병부 자록丙部 子錄 법가法家:≪한자韓子≫ 20권이다.注+한비韓非가 지었다.
[唐書藝文志丙部子錄法家] 韓子二十卷注+韓非이라 尹知章注韓子注+卷亡이라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병부 자록丙部 子錄 법가法家:≪한자韓子≫ 20권이다.注+한비韓非가 지었다. 윤지장尹知章이 ≪한자韓子≫의 를 달았다.注+책은 망실되었다.
[宋史藝文志子類法家類] 韓子二十卷注+韓非撰이라이라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자류 법가류子類 法家類:≪한자韓子≫ 20권이다.注+한비韓非가 지었다.
[晁公武郡齋讀書志子類法家類] 韓非子二十卷이라 右韓非撰하다
조공무晁公武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자류 법가류子類 法家類:≪한비자韓非子≫ 20권이다. 위의 책은 한비韓非가 지었다.
韓之諸公子也 喜刑名法術之學하야 作孤憤五蠹說林說難十餘萬言하다
한비는 나라 여러 공자 중의 한 사람이다. 형명刑名법술法術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여, 〈고분孤憤〉, 〈오두五蠹〉,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
秦王見其書하고 歎曰 得此人與之遊 死不憾矣로다하고 急攻韓하야 得非하다 後用李斯之毁하야 下吏하야 使自殺하다
진왕秦王이 그의 책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을 만나서 함께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고 급히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비를 만났으나, 뒤에 이사李斯의 모함을 받아들여 한비를 형리刑吏에게 넘겨 자살하게 하였다.
書凡五十五篇이니 其極刻覈하고 無誠悃하야 謂夫婦父子擧不足相信이니라
책은 모두 55편인데, 논의가 너무 각박하고 성심이 없어서 부부와 부자까지도 모두 서로 믿을 수 없다고 여기게 하였다.
有解老喻老篇이라 故太史公以爲大要皆原於道德之意하니라 夫老子之言高矣어늘 世皆怪其流裔何至於是
그런데 〈해로解老〉, 〈유로喩老〉편이 있었으므로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은 그 대요大要가 모두 ≪도덕경道德經≫의 뜻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노자老子의 말은 고상한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후예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노자의 글에 “장차 접히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주며,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며,
將欲廢之인댄 必固興之하며 將欲奪之인댄 必固與之라하고
장차 폐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며, 장차 빼앗으려 하면 반드시 먼저 주어라.”라고 한 것과 “사람의 위에 있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은 겸손하게 하고,
欲先人者인댄 必以其身後之之言 乃詐也 此所以一傳而爲非歟인저
사람의 앞에 서고자 한다면 반드시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라고 한 말 따위가 속임수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노자가 한번 전해져서 한비가 된 까닭이다.
[陳振孫直齋書錄解題] 法家類 韓子二十卷이라 韓諸公子韓非撰하다
진진손陳振孫직재서록直齋書錄해제解題법가류法家類한자韓子≫ 20권이다. 나라 여러 공자 중의 한 사람인 한비韓非가 지었다.
漢志五十五篇이니 今同이라 所謂孤憤說難之屬皆在焉이라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55편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과 같다. 이른바 〈고분孤憤〉, 〈세난說難〉 등의 편이 모두 들어 있다.
[王應麟漢藝文志攷證] 韓子五十五篇이라 史記韓非傳 喜刑名法術之學하야 而其歸本於黃老라하고
왕응린王應麟한예문지고증漢藝文志攷證≫:≪한자韓子≫ 55편이다. ≪사기史記≫ 〈한비열전韓非列傳〉에 “〈한비韓非는〉 형명刑名법술法術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그 학설의 근본은 황제黃帝 사상에 귀결되었다.”라고 하였고,
作孤憤五蠹內外儲說林說難十餘萬言이라하니 新序曰 申子書號曰術하고 商鞅書號曰法하니 皆曰刑名이라하다
또 “〈고분孤憤〉, 〈오두五蠹〉,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그 에 “≪신서新序≫에 이르기를 ‘신자申子(신불해申不害)의 글은 「」이라고 불렀고, 상앙商鞅의 글은 「」이라고 불렀는데, 모두 「형명刑名」이라 한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曰 太史公謂非喜刑名法術之學하니 則兼治之也라하다
동래 여씨東萊 呂氏(여조겸呂祖謙)는 “태사공太史公이, 한비韓非형명刑名법술法術에 관한 학문을 좋아한다고 하였으니, 곧 그것들을 겸하여 연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索隱 按韓子書有解老喻老二篇하니 是亦崇黃老之學也라하다 今本二十卷五十六篇注+辨見後이라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살펴보건대 한자韓子의 글에 〈해로解老〉와 〈유로喩老〉 두 편이 있으니, 이 역시 황제黃帝노자老子의 학문을 숭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본今本은 20권 56편이다.注+변설辨說이 뒤에 보인다.
曰 非書有存韓篇이라 故李斯言非終為韓不爲秦也
사수 정씨沙隨 程氏(정형程逈)는 “한비의 글에 〈존한存韓〉편이 있으므로 이사李斯한비韓非는 끝내 나라를 위하지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後人誤以范雎書廁于其書之間하니 乃有舉韓之論이라 通鑑謂非欲覆宗國 則非也라하다
후대 사람들이 잘못 범저范雎의 글을 그의 글 사이에 끼워 넣으니 마침내 〈한비가〉 한나라로 출병하기를 권했다는 의론이 나오게 되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한비韓非종국宗國()을 엎어뜨리고자 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곤학기문困學紀聞≫ 10:한자韓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법은 거리에 재를 버리는 자를 형벌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형벌을 무겁다고 여겨 그 까닭을 중니仲尼에게 묻자, 중니는 ‘다스리는 방법을 안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以商鞅之法爲殷法하고 又託於仲尼하니 法家侮聖言至此
상앙商鞅의 법을 나라의 법으로 만들고 또 중니에게 가탁하였으니, 법가法家가 성인의 말을 업신여긴 것이 이에 이르렀다.
注+內儲說右下이라하니 斯言不可以韓非廢
또 “관리는 백성의 뿌리이자 벼리이니, 성인은 관리를 다스리지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注+내저설 우하內儲說 右下〉에 나온다. 이 말은 한비가 한 말이라고 해서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
[國朝四庫全書總目子部法家類] 韓子二十卷注+內府藏本이라이라 周韓非撰하다
국조國朝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자부 법가류子部 法家類:≪한자韓子≫ 20권이다.注+내부장본이다. 나라 한비韓非가 지었다.
漢書藝文志載韓子五十五篇하고 張守節史記正義 引阮孝緒七錄하야 載韓子二十卷하니 篇數卷數 皆與今本相符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한자韓子≫ 55편이 기재되어 있고,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원효서阮孝緒의 ≪칠록七錄≫을 인용하여 ≪한자韓子≫ 20권을 기재하였으니, 편수와 권수가 모두 금본今本과 서로 부합된다.
惟王應麟漢藝文志考證作五十六篇하니 殆傳寫字誤也 其注不知何人作이라
오직 왕응린王應麟의 ≪한예문지고증漢藝文志考證≫에만 56편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글자가 잘못된 듯하다. 그 는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考元至元三年 何犿本稱舊有李瓚注 鄙陋無取하고 盡為削去云云하니 則注者當為李瓚이나 然瓚為何代人 犿未之言하니라
상고하건대, 나라 지원至元 3년(1266)에 하변본何犿本에서 “예전에 리찬李瓚가 있었으나, 비루해서 취하지 않고 모두 삭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를 지은 자는 마땅히 이찬이 되어야 하지만 이찬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하변이 말하지 않았다.
王應麟玉海已稱韓子注不知誰作하고 諸書亦別無李瓚注韓子之文하니 不知犿何所據也
왕응린의 ≪옥해玉海≫에 이미 ≪한자韓子≫의 는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 하였고, 여러 책에서도 이찬이 ≪한자韓子≫의 주를 지었다는 글은 따로 없다. 그러니 하변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犿本僅五十三篇이니 其序 稱內佚姦劫一篇 說林下六微內似類以下數章이라하니라
하변본何犿本은 겨우 53편인데, 그 서문에 “내편內篇 중 〈간겁姦劫〉 1편과 〈설림 하說林 下〉, 〈육미六微〉 내의 ‘사류似類’ 아래 몇 이 일실되었다.”라고 하였다.
明萬曆十年 趙用賢購得宋槧하야 與犿本相校하야 始知舊本六微篇之末 尚有二十八條하니 不止犿所云數章이요
나라 만력萬曆 10년(1582)에 조용현趙用賢송참본宋槧本을 구매하여 하변본何犿本과 비교하여,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이러하다. 구본舊本의 〈육미편六微篇〉 끝에 28조가 그대로 있으니 하변이 말한 몇 에 그치지 않고,
說林下篇之首 尚有伯樂教二人相踶馬等十六章이어늘 諸本佚脫其文하고
설림 하편說林 下篇〉의 앞머리에 ‘백락교이인상제마伯樂教二人相踶馬’ 등 16이 그대로 있는데 여러 본에는 그 문장이 일실되거나 떨어져 나갔고,
以說林上篇田伯鼎好士章으로 逕接此篇蟲有蚘章하고 和氏篇之末 自和雖獻璞而未美未為王之害也以下 脫三百九十六字하고
설림 상편說林 上篇〉의 ‘전백정호사田伯鼎好士을 이 편의 ‘충유회蟲有蚘에 곧바로 이었으며, 〈화씨편和氏篇〉의 말미의 ‘화수헌박이미미미위왕지해야和雖獻璞而未美未為王之害也’ 아래로 396자가 탈락되었고,
姦劫篇之首 自我以清廉事上以上으로 脫四百六十字하니 其脫葉 適在兩篇之間이라 故其次篇標題與文俱佚이어늘
간겁편姦劫篇〉 앞머리의 ‘아이청렴사상我以清廉事上’ 위로 460자가 탈락되었는데, 탈락된 책장이 마침 두 편의 사이에 있으므로 그 다음 편의 표제와 글이 모두 일실되었는데,
傳寫者各誤以下篇之半連於上篇하야 遂求其下篇而不得하니 其實未嘗全佚也
전사傳寫한 사람이 각각 잘못하여 아래편의 반을 위편에 이어서 마침내 그 아래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것이니, 그 실상은 일찍이 전부 일실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今世所傳 又有明周孔教所刊大字本하니 極為精楷 其序不著年月하야 未知在用賢本前後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 중에 또 나라 주공교周孔教가 간행한 대자본大字本이 있는데, 매우 정교하고 단정하지만 그 서문에 연월이 밝혀져 있지 않아서 조용현본趙用賢本과 선후관계를 알 수가 없다.
考孔教舉進士 在用賢後十年이니 疑所見亦宋槧本이라 故其文均與用賢本同이요 無所佚闕이라
상고하건대, 주공교가 진사進士에 합격한 것이 조용현보다 10년 뒤이니, 아마 그가 본 것도 역시 송참본宋槧本이기 때문에 그 글이 고루 조용현본과 같고, 일실된 것은 없는 듯하다.
今即據以繕錄하고 而校以用賢之本하노라
지금 곧 이(대자본大字本)를 근거로 필사하고 조용현본으로 교정하였다.
考史記非本傳 稱非見韓削弱하고 數以書諫韓王호되 韓王不能用이라하고
상고하건대, ≪사기史記≫ 〈한비열전韓非列傳〉에 “한비韓非나라가 땅은 줄어들고 국력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자주 글을 올려 한왕韓王에게 간했으나, 한왕이 채용하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悲廉直不容於邪枉之臣하고 觀往者得失之變이라 故作孤憤五蠹內外儲說說林說難十餘萬言이라하며
또 “청렴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사악하고 부정한 신하들 때문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고 지나간 시절의 성패득실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저설內儲說〉, 〈외저설外儲說〉,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又云人或傳其書至秦하야 秦王見其孤憤五蠹之書라하니 則非之著書 當在未入秦前이라
또 “어떤 사람이 그의 글을 전파해 나라까지 전해지자, 진왕秦王이 〈고분孤憤〉, 〈오두五蠹〉 등의 글을 보았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비의 저서는 마땅히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쓰여진 것이다.
史記自敍 所謂韓非囚秦說難孤憤者 乃史家駁文이니 不足為據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敍〉에 “한비가 진나라의 옥에 갇혀서 〈세난說難〉, 〈고분孤憤〉을 지었다.”고 한 것은 사가史家에서 반박하는 글이니, 근거로 삼을 수 없다.
今書冠以初見秦하고 次以存韓하니 皆入秦後事
지금의 책이 〈초견진初見秦〉을 맨 앞에 두고 그 다음에 〈존한存韓〉을 두었으니, 모두 진나라에 들어간 뒤의 사실이다.
雖似與史記自序相符 然傳稱韓王遣非使秦하니 秦王悅之로되 未信用이어늘
비록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말한 내용과 서로 부합하지만 〈한비열전韓非列傳〉에 “한왕韓王이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자 진왕秦王이 기뻐하면서도 믿고 등용하지 못하였는데,
李斯姚賈害之하야 下吏治非 李斯使人遺之藥하야 使自殺이라하니 計其間未必有暇著書
이사李斯요가姚賈가 한비를 모해하여 형리刑吏에게 넘겨 한비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사가 사람을 시켜 한비에게 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와중에 필시 글을 지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且存韓一篇 終以李斯駁非之議 及斯上韓王書하니 其事與文 皆為未畢이라
또 〈존한存韓〉 한 편은 이사가 한비를 반박하는 의론과 이사가 한왕에게 올린 글로 끝을 맺었으니, 그 사실과 글이 모두 완결된 것이 아니다.
疑非所著書本各自為篇이라가 非歿之後 其徒收拾編次하야 以成一帙이라
아마도 한비가 지은 글이 본래 각기 독립된 한 편으로 있다가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문도門徒들이 수습하고 편차하여 한 로 만들었기 때문에,
故在韓在秦之作 均為收錄하고 併其私記未完之稿 亦收入書中하야 名為非撰이니 實非非所手定也
한나라에 있을 때 지은 것과 진나라에 있을 때 지은 것을 고루 수록하고 사사로이 기록하거나 완성되지 못한 원고도 아울러 책 안에 거두어 넣어서 한비가 지은 것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실상은 한비가 직접 편정編定한 것은 아니다.
以其本出於非 故仍題非名하야 以著於錄焉하노라
그렇지만 그것도 본래 한비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대로 한비의 이름을 써서 목록에 기록하였다.
[四庫全書子部法家類存目] 韓子迂評二十卷注+內府藏本이라이라
사고전서四庫全書자부 법가류子部 法家類 존목存目:≪한자우평韓子迂評≫ 20권이다.注+내부장본이다.
舊本題明門無子評하고 前列元何犿校上하고 原序署至元三年秋七月庚午하고 結銜題奎章閣侍書學士하다
구본舊本에는 ‘나라 문무자門無子하다.’라고 쓰여 있고, 앞 열에는 ‘나라 하변何犿교상校上하다.’라고 되어 있고, 원서原序에 ‘지원至元 3년(1266) 가을 7월 경오庚午’라고 쓰여 있고, 결함結銜(관리의 직위를 쓰는 것)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 侍書學士’라고 쓰여 있다.
考元世祖順帝俱以至元紀年이어늘 而三年七月 以紀志干支排比之컨대 皆無庚午日하니 疑子字之誤
상고하건대, 원나라 세조世祖순제順帝가 모두 ‘지원至元’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3년 7월을 가지고 기지紀志(사서史書본기本紀)의 간지干支를 배열해 비교해보면 모두 경오일庚午日이 없으니, 아마도 〈‘’자는〉 ‘’자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奎章閣學士院 設於文宗天歷二年하야 止有大學士라가 尋陞為學士院하야 始有侍書學士하니 則犿進是書在後至元時矣
규장각 학사원奎章閣 學士院문종 천력文宗 天曆 2년(1329)에 설립하여 대학사大學士만 두었다가 얼마 후에 학사원學士院으로 승격되어 비로소 시서학사侍書學士를 두었으니, 그렇다면 하변이 이 책을 진상한 것은 지원至元 연간 이후의 일이다.
觀其序中 稱今天下所急者 法度之廢 所少者 韓子之臣하면 正順帝時事勢也
그 서문의 내용 중에 “지금 천하에 시급한 것은 법도法度가 폐해진 것이고, 부족한 것은 한자韓子와 같은 신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바로 순제順帝 때의 형세이다.
門無子自序 稱坊本至不可句讀러니 最後得何犿本하야 字字而讐之호되 皆不失其舊하니
문무자의 자서自序에 “방본坊本구두句讀를 뗄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최근에 하변본何犿本을 구해서 글자마다 수교讐校하되 모두 옛 모습을 잃게 하지 않았으니,
乃句為之讀하고 字為之品하며 間取何氏注而折衷之하야 以授之梓人云云이라하니
비로소 구를 떼어 읽고 글자를 품정하였으며, 간간이 하씨何氏를 취해 절충하여 재인梓人에게 주어 판각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蓋趙用賢翻刻宋本 在萬曆十年이요 此本刻於萬曆六年이라 故未見完帙하야 仍用何氏之本이라
조용현趙用賢송본宋本번각翻刻한 것은 만력萬曆 10년(1582)이고 이 판본은 만력萬曆 6년(1578)에 판각되었다. 그러므로 완질은 보지 못하고서 그대로 하씨본何氏本을 이용한 것이다.
然犿序 稱李瓚注鄙陋無取하고 盡為削去라하나 而此本仍間存瓚注하니 已非何本之舊
그러나 하변의 에 “리찬李瓚는 비루해서 취하지 않고 모두 삭제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 판본은 여전히 사이사이에 이찬의 가 남아 있으니, 이미 하본何本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且門無子序 又稱取何注折衷之라하니 則併犿所加旁注 亦有增損하니 非盡其原文이라
또 문무자의 자서自序에 “하변의 를 취하여 절충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하변이 덧붙인 방주旁注도 아울러 가감한 것이 있는 것이니, 모두 그 원문은 아니다.
蓋明人好竄改古書하야 以就己意하야 動輒失其本來 萬曆以後 刻版皆然하니 是書亦其一也
나라 사람들은 옛글을 고쳐 바꾸어서 자기 뜻에 맞추기를 좋아해서 걸핏하면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만력萬曆 연간 이후의 판각이 다 그러하니, 이 책도 그중 하나이다.
門無子不知為誰 陳深序 稱門無子俞姓이요 吳郡人이니 篤行君子라하나 然新舊志乘 皆不載其姓名이라
문무자門無子는 누구인지 모르겠거니와, 진심陳深에 “문무자門無子는 성이 이고 오군吳郡 사람이니, 독실한 군자이다.”라고 하였으나 신구新舊지승志乘에 모두 그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所綴評語 大抵皆學究八比之門徑이요 又出犿注之下 所見如是하니 宜其敢亂舊文矣로다
모아 기록해놓은 평어評語는 대체로 학구學究(과학科學 공부하는 사람)가 팔고문八股文[과문科文]을 익히는 경로이고, 또 하변의 아래에서 나온 것이다. 본 것이 이와 같으니 감히 옛 글을 어지럽힌 것이 당연하다.
[四庫全書簡明目錄] 韓子二十卷이라 周韓非撰이니 凡五十五篇이라
사고전서간명목록四庫全書簡明目錄≫:≪한자韓子≫ 20권이다. 나라 한비韓非가 지었으니, 모두 55편이다.
舊本多所佚脱이러니 明趙用賢始得宋槧校補하다 又周孔教家大字刻本與趙本亦同일새 今用以互校하니 視他刻本為完善이라
구본舊本에 일실되고 떨어져 나간 것이 많았는데, 나라 조용현趙用賢이 처음으로 송참본宋槧本을 구해 교정하고 보완하였다.
其注不知何人作이어늘 元何犿稱為李瓚이나 未知何據也
주공교周孔教 집안의 대자각본大字刻本조본趙本과 같기 때문에 지금 이를 이용하여 서로 참고해 교정하니 다른 각본刻本과 비교하면 완선完善하게 되었다. 그 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데, 나라 하변何犿리찬李瓚이 지었다고 하였으나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 알 수 없다.
[孫氏祠堂書目諸子法家] 韓非子二十卷注+一明趙用賢刊本이요 一明吳勉學刊本이요 一明葛鼎刊本이요 一明十行本缺二卷이요 一依宋刻校本이라이라
손씨사당서목孫氏祠堂書目제자법가諸子法家:≪한비자韓非子≫ 20권이다.注+1.나라 조용현 간본趙用賢 刊本이다. 1.나라 오면학 간본吳勉學 刊本이다. 1.나라 갈정 간본葛鼎 刊本이다. 1.나라 십행본十行本으로 2권이 결락되었다. 1.나라 각본刻本에 의거한 교본校本이다.
[盧文弨群書拾補] 韓非子是書有明馮舒己蒼 據宋本道藏本以校張鼎文本外 又有明凌瀛初本 黃策大字本하니
노문초盧文弨군서습보群書拾補≫:≪한비자韓非子≫ 이 책은 나라 풍서 기창馮舒 己蒼(풍서馮舒)이 송본宋本도장본道藏本에 근거하여 장정문본張鼎文本을 교정한 것 외에 또 명나라 능영초본凌瀛初本황책대자본黃策大字本이 있는데,
今并以校明神廟十年趙用賢二十卷全本이라 而以是者大書하고 其異同作小字注於下
지금 이 세 본을 아울러 명나라 신종神宗 10년(1582)에 조용현趙用賢이 판각한 20권 전본全本을 교정하였다. 옳은 것은 큰 글자로 쓰고 차이가 나는 것은 작은 글자를 써서 아래에 를 달았다.
此書注乃元人何犿刪舊李瓚注而爲之者 亦甚略하고 且鄙謬者亦未刊去
이 책의 나라 사람 하변何犿이 옛 리찬李瓚를 산삭하여 만든 것인데, 또한 너무 소략한데다가 너저분하고 잘못된 것도 삭제하지 않았다.
明孫月峰評點本 幷無注하니 玆不取在所校本中이라
명나라 손월봉孫月峰평점본評點本은 모두 가 없으니, 이에 교정한 본 가운데 취하지 않았다.
[吳山尊重刻韓非子序] 翰林前輩夏邑李書年先生 好藏古書精槧하니 而宋乾道刻本韓非子 尤其善者
오산존 중각吳山尊 重刻한비여韓非予한림원翰林院의 선배 하읍夏邑 사람 이서년 선생李書年 先生이 고서와 좋은 판본을 보관하는 일을 좋아하였는데, 나라 건도각본乾道刻本한비자韓非子≫는 특히 아끼는 것이었다.
嘉慶辛未 先生方為吾省布政使하야 察賑鳳潁할새 鼒以後進禮謁於塗次하고 求借是書한대 先生辭以在里中하다
가경嘉慶 신미년(1811)에 선생이 우리 포정사布政使가 되어 봉영鳳潁 지방을 순찰하여 진휼할 때 나는 후진後進으로서 선생이 도중의 머무는 곳에서 예를 다하여 뵙고는 이 책을 빌려주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집에 있다며 거절하였다.
又六年丙子六月 余在揚州러니 先生督漕淮上할새 專使送是冊來어늘 迺屬好手影鈔一本하고 以原本還先生하니라
또 6년이 지난 병자년(1816) 6월에 내가 양주揚州에 있었는데, 선생이 회수淮水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할 적에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 책을 보내주시기에, 나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한 본을 베낀 다음 원본은 선생에게 돌려보냈다.
明年丁丑五月 携至江甯하니 孫淵如前輩慫恿付梓 又明年戊寅五月刻成이어늘 而淵如已歸道山하니 可痛也로다
이듬해 정축년(1817) 5월에 식솔을 데리고 강녕江甯에 오니 손연여孫淵如 선배가 필사해놓은 것을 판각하라고 종용하였다. 그 이듬해 무인년(1818) 5월에 판각이 완성되었는데 손연여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애통하도다.
是本為明趙文毅刻本所自出이로되 卻有以他本改易處어늘 元和顧君千里實為余校刊하니라
이 판본은 나라 조문의趙文毅(조용현趙用賢)의 각본刻本 가운데 나온 것이지만 다른 판본을 가지고 고치거나 바꾼 부분이 있었는데, 원화元和 사람 고천리顧千里(고광기顧廣圻)가 실로 나를 위해 교감하여 판각하였다.
千里十四年前已見此冊하야 抉摘標舉하야 具道此槧之所以善이라 宋槧誠至寶 得千里而益顯矣
고천리는 14년 전에 이미 이 책을 읽고서 이 판본의 좋은 점을 지적하고 제시하여 모두 말하였다. 송나라 판본이 참으로 지극한 보배이나 고천리에 의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千里別有識誤三卷하야 出以贈余어늘 附刻書後하고 仍歸之千里하니라
고천리는 별도로 ≪한비자식오韓非子識誤≫ 3권을 저술하여 나에게 내어주었기에 그것을 책 뒤에 덧붙여 판각하고 고천리에게 돌려주었다.
昔鼒為師恭跋御製文하고 及代擬進御文하야 屬邀兩朝褒賞이어늘
예전에 내가 스승인 주문정朱文正을 위해 삼가 어제문御製文의 발문을 짓고 또 대신 진어문進御文을 지어 두 조정에서 연이어 포상을 받았는데,
文正曾以奏聞今上하고 退謂其子錫經호되 必以藁還鼒하야 聽入私集하니라
주문정이 일찍이 금상今上에게 아뢰고 물러나서는 그의 아들 석경錫經에게 말하되, “반드시 원고를 오자吳鼒에게 돌려주어 그의 문집에 넣게 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且與鼒書曰 一不可掠人之美 一不可欲亂我之真也라하니라
게다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하나라도 남의 훌륭한 점을 빼앗지 말고, 하나라도 자신의 참됨을 어지럽히지 말라.”라고 하였다.
鼒老且病이나 然尚思假年居業하야 以期有以自立이요 不敢鷃披隼翼하고 鹿蒙虎皮也하노라
나는 늙고 병들었지만 오히려 더 살면서 학업을 닦아 자립할 수 있기를 생각하는 것이지, 감히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걸치거나 사슴이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려는 것이 아니다.
是年月陽在己巳已朏 舊史氏吳鼒序하노라
이해 기사월 초삼일 다음날에 옛 사관 오자吳鼒는 서문을 짓는다.
[顧千里韓非子識誤序] 予之爲韓子識誤也 歲在乙丑이니 客於揚州太守陽城張古餘先生許
고천리顧千里한비자식오韓非子識誤:내가 ≪한비자식오韓非子識誤≫를 지은 것은 을축년(1805)이니 양주태수揚州太守양성陽城 사람 장고여張古餘 선생의 문객으로 있을 때였다.
宋槧本 太守所借也 與予向所得述古堂影鈔正同이라 第十四卷失第一葉일새 以影鈔者補之
한비자韓非子나라 판본은 태수가 빌려준 것인데, 예전에 내가 술고당述古堂에 찾은 영초본影鈔本과 똑같았다. 송나라 판본 141이 망실되었기에 영초본으로 보충하였다.
前人多稱道藏本 其實差有長於趙用賢刻本者耳 固遠不如宋槧也라하니라
전인들은 대부분 도장본道藏本조용현각본趙用賢刻本보다 실제 조금 나은 점이 있지만 본디 송나라 판본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하였다.
宋槧首題 乾道改元中元日黄三八郎印이라하니 亦頗有誤
송나라 판본의 수제首題에는 “건도 원년乾道 元年 중원일中元日(1165년 7월 15일)에 황삼팔랑黄三八郎이 인행하다.”라고 쓰여 있는데, 이 또한 자못 오류가 있다.
通而論之컨대 宋槧之誤 由乎未嘗校改 故誤之迹往往可尋也 而趙刻之誤 則由乎凡遇其不解者 必校改之
통틀어 말하건대, 송나라 판본의 오류는 일찍이 교개校改한 적이 없었던 데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오류의 자취를 종종 찾을 수 있고, 조용현각본趙用賢刻本의 오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곳을 만나면 굳이 교개校改한 데에서 연유한다.
於是而并宋槧之所不誤者일새 方且因此以至於誤
이 때문에 송나라 판본 가운데 오류가 아닌 것들까지 함께 교개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오류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其宋槧之所誤 又僅苟且遷就하야 仍歸於誤하야 而徒使可尋之迹泯焉하니 豈不惜哉리오
송나라 판본의 오류라고 교개한 부분은 또 구차하고 억지로 맞추어 오류를 만들어내어, 오류를 찾아낼 수 있는 자취마저 없어지게 만들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予讐勘數過하야 推求彌年 既窺得失하야 乃條列而識之하고 不可解者未敢妄説이라
내가 수차례 교감하여 해를 넘기면서 찾아내어 이미 그 득실을 보고나서 조목별로 열거하여 기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감히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庚午在里中이러니 友人王子渭爲之寫録하야 間有所論하고 厥後攜諸行篋하야 隨加増定이라
경오년(1810) 고향에 있었는데 벗 왕위王渭가 이것을 베껴 기록하여 간간이 토론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 행협行篋을 가지고 다니면서 생각나는 대로 수정을 하였다.
甲戌以來 再客揚州러니 値全椒呉山尊學士하야 知宋槧之善하야 重刊以行할새 復舉識誤附於末이라
갑술년(1814) 이후로 다시 양주揚州에서 객살이 하였는데, 전초全椒 사람 오산존 학사呉山尊 學士(오자吳鼒)를 만나 송나라 판본이 선본이라는 것을 알아 그것을 중간하여 반포할 적에, 다시 ≪한비자식오韓非子識誤≫를 책의 끝에 덧붙였다.
竊惟智苶學短하니 曾何足云이리오 庶後有能讀此書者 將尋其迹 輒以不敏爲之先道也하노라
삼가 생각건대 지혜도 보잘 것 없고 학문도 짧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행여 훗날 이 책을 읽는 자가 장차 그 자취를 찾아낼 때 곧 불민한 나로써 선도先導를 삼기 바란다.
嘉慶廿一年歳在丙子秋八月 元和顧廣圻序하노라
가경嘉慶 21년 병자년(1816) 가을 8월에 원화 고광기元和 顧廣圻는 서문을 짓노라.
先愼按 藏本有南北之分이라 故顧氏與盧氏所校多不合이라
내가 살펴보건대, 도장본道藏本에는 남본南本북본北本의 구분이 있기 때문에 고광기顧廣圻노문초盧文弨가 교감한 것이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孫詒讓札迻卷七] 韓非子某氏注注+吳鼒景宋乾道刻本이요 顧廣圻識誤校 日本蒲阪圓增讀韓非子校 盧文弨群書拾補校 王念孫讀書雜志餘編校 兪樾諸子平議校
손이양孫詒讓찰이札迻7:≪한비자韓非子≫에 대한 모씨某氏이다.注+오자吳鼒나라 건도본乾道本을 영인한 각본刻本, 고광기顧廣圻의 ≪한비자식오韓非子識誤≫와 교감, 일본 포판원증日本 蒲阪圓增의 ≪독한비자讀韓非子≫와 교감, 노문초盧文弨의 ≪군서습보群書拾補≫와 교감, 왕염손王念孫의 ≪독서잡지여편讀書雜志餘編≫과 교감, 유월兪樾의 ≪제자평의諸子平議≫와 교감하였다.
역주
역주1 將欲歙之……必固與之 : 이 내용은 ≪老子道德經≫ 36장에 보인다.
역주2 欲上人者……必以其身後之 : 이 내용은 ≪老子道德經≫ 66장에 보인다. 약간의 글자 출입이 있다.
역주3 東萊呂氏 : 宋나라 呂祖謙을 가리킨다. 자는 伯恭, 호는 東萊이다. 朱熹․張栻과 함께 東南三賢으로 불리었고, 학설은 經史의 실용을 주장하고 性命說에 얽매이지 않았다. 주희와 함께 북송 도학자의 어록을 편집하여 ≪近思錄≫을 편찬하였으며, 저서로 ≪東萊左氏博議≫․≪古周易≫․≪春秋左氏傳說≫․≪呂氏家塾讀持記≫․≪歷代制度詳說≫․≪東萊集≫ 등이 있다.(≪宋史≫ 권434, ≪宋元學案≫ 권42․43․46․51)
역주4 沙隨程氏 : 宋나라 程逈을 가리킨다. 자는 可久, 호는 沙隨이다. 일찍이 王葆와 嘉興의 학자 茂德, 嚴陵, 喩樗에게 경전을 배웠는데, 朱熹가 그를 스승의 예로써 섬겼다. 박학하였고 경사에 조예가 깊었으며, 불교와 도가, 음운에 이르기까지 두루 연구하였다. 저서로 ≪古易考≫․≪古易章句≫․≪易傳外編≫․≪春秋傳顯微例目≫․≪論語傳≫․≪孟子章句≫․≪經史說諸論辨≫․≪四聲韻≫․≪古韻通式≫․≪醫經正本書≫․≪三器圖義≫․≪南齋小集≫ 등이 있는데, ≪周易古占法≫․≪周易章句外編≫이 전한다.(≪宋史≫ 권437, ≪宋元學案≫ 권25)
역주5 殷之法……知治之道也 : ≪韓非子≫ 〈內儲說 上 七術〉에 나온다.
역주6 又吏者……不治民 : ≪韓非子≫ 〈外儲說 右下〉에 나온다. 본문의 주는 잘못이다.
역주7 朱文正 : 淸나라 朱筠이다. 시호가 文正公이기 때문에 일컬은 명칭이다. 乾隆 19년(1754)에 進士에 급제하였고 翰林學士를 지냈다. 博學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문하에 洪亮吉․孫星衍․章學誠․吳鼒 등 저명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한비자집해(1) 책은 2019.10.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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