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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非子集解(1)

한비자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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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집해(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30 秦與荊人戰하야 大破荊하야 襲郢하고 取洞庭五湖江南하니
○盧文弨曰 湖 作都하고 一作渚 顧廣圻曰 吳師道云 都 當從韓作湖라하니 今案吳說 非也
燕策云 四日而至五渚라하고 蘇秦列傳同이라 引戰國策取洞庭五渚하니 渚都同字 是渚之譌
王先謙曰 史記秦紀 三十年 取江南爲黔中郡이라하야늘 引括地志云 黔中故城 在辰州沅陵縣西二十里하고
又三十一年 楚人反我江南이라하고 六國表云 秦所拔我江旁反秦이라하니 楚世家所謂江旁十五邑也
先愼曰 蘇秦傳集解 引戰國策云 秦與荊人戰하야 大破荊하야 襲郢하고 取洞庭五渚라하고 然則五渚 在洞庭이라하다
案裴說誤讀策文耳 高注 楚都也 洞庭五渚江南 皆楚邑也
五渚 五處洲也 以爲五渚 宛鄧之間으로 臨漢水하니 不得在洞庭이라하니 湖乃渚之誤 顧說是


진나라가 초나라와 전쟁하여 초나라를 크게 격파하고서 국도인 을 습격하고 동정洞庭오호五湖강남江南을 점령하니,
노문초盧文弨:‘’는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로 되어 있고, 어느 책에는 ‘’로 되어 있다. 고광기顧廣圻오사도吳師道는 “‘’는 응당 ≪한비자韓非子≫를 따라 ‘’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오사도의 설이 틀렸다.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4일 만에 오저五渚에 도착했다.” 하였고,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도 이와 같다.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의 ‘취동정오저取洞庭五渚’라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와 ‘’는 같은 글자이고, ‘’는 바로 ‘’의 오자이다.
왕선겸王先謙:≪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소왕昭王 30년(B.C.277)에 강남江南을 점령하여 검중군黔中郡을 삼았다.”라 하였는데,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괄지지括地志≫에 ‘검중 고성黔中 古城신주 원릉현辰州 沅陵縣의 서쪽 20리에 있다.’고 하였다.” 한 것을 인용하였고,
또 소왕 31년에 “초인楚人강남江南에서 우리()를 배반하였다.”라 하였고, ≪사기史記≫ 〈육국표六國表〉에 “나라가 함락했던 우리 강방江旁 지역의 사람들이 진나라를 배반하였다.”라 하였으니, 〈초세가楚世家〉에서 말한 ‘강방 15’이다.
왕선신王先愼:≪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나라가 나라와 전쟁하여 초나라를 크게 격파하여 영도郢都를 습격하고 동정洞庭오저五渚를 점령하였다.’ 하였다.”고 인용하고 “그렇다면 ‘오저五渚’는 동정에 있는 것이다.”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배인裴駰의 설(≪사기집해史記集解≫의 설)은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의 내용을 잘못 읽은 것이다. 고유高誘에 “나라 국도國都이고, 동정․오저․강남은 모두 초나라의 읍이다.” 하였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오저五渚는 다섯 곳의 물속 섬이다. 유씨劉氏는 ‘오저는 사이의 땅으로 한수漢水에 접해 있으니, 동정에 있지 않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는 곧 ‘’의 오자이니, 고광기의 설이 옳다.


역주
역주1 集解 : ≪史記集解≫를 말한다. 南朝 宋나라의 裴駰이 歷代 諸家의 說을 모아서 편찬한 ≪史記≫의 注釋書로, ≪史記索隱≫․≪史記正義≫와 함께 ≪史記≫ 三家注의 하나이다.
역주2 昭王 : 秦 昭襄王의 약칭으로, 秦 始皇의 증조부이다.
역주3 正義 : ≪史記正義≫를 말한다. 唐나라 張守節이 지은 ≪史記≫의 注釋書로, ≪史記≫ 三家注의 하나이다.
역주4 索隱 : ≪史記索隱≫을 말한다. 唐나라의 司馬貞이 지은 ≪史記≫의 주석서로, ≪史記≫ 三家注의 하나이다.
역주5 劉氏 : 唐나라의 劉伯莊을 말한다. 유백장은 彭城 사람으로, 弘文館學士를 지냈다. 許敬宗 등과 ≪文思博要≫․≪文官詞林≫을 편찬하였고, 저서에 ≪史記音義≫․≪史記地名≫․≪漢書音義≫가 있다.

한비자집해(1) 책은 2019.10.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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