昔周公稽古
之道
하고 損益夏殷之典
하여 制禮作樂
하고 以仁義
天下
라
에 諸侯力政
하고 逮
之後
하여는 則王道不絕如綫
이라
故仲尼定禮樂
하고 作春秋
하니 然後
遺風
이 弛而復張
이나 而無時無位
하여 功烈不得被于天下
하고 但門人傳述而已
며 陵夷至于戰國
이라
於是申商苛虐과 孫吳變詐 以族論罪하고 殺人盈城이라
談說者又以愼墨蘇張爲宗하니 則孔氏之道 幾乎息矣라 有志之士 所爲痛心疾首也라
觀其立言指事에 根極理要하고 敷陳往古하며 掎挈當世하여 撥亂興理를 易於反掌하니 真名世之士며 王者之師라
又其書亦所以羽翼
하고 增光孔氏
하니 非徒諸子之言也
라
蓋周公制作之
하고 仲尼祖述之
하고 荀孟贊成之
하여 所以膠固王道
하여 至深至備
하니 雖春秋之四夷交侵
하고 戰國之
弛絕
이라도 斯道竟不墜矣
라
倞以末宦之暇에 頗窺篇籍하여 竊感炎黃之風이 未洽於聖代나 謂荀孟有功於時政하여 尤所耽慕라
而孟子有
하고 注+臣先謙案 宋台州本作代라亦嘗立博士
하여 傳習不絕
이라 故今之君子多好其書
라
獨荀子未有注解하고 亦復編簡爛脫하며 傳寫謬誤하여 雖好事者時亦覽之라도 至於文義不通하여 屢掩卷焉이라
未知者謂異端不覽하고 覽者以脫誤不終하니 所以荀氏之書千載而未光焉이라
輒用申抒鄙思하여 敷尋義理하고 其所徵據는 則博求諸書하니라
但以古今字殊하고 齊楚言異하여 事資參考를 不得不廣일새
或取
相近
이어나 聲類相通
하고 或字少增加
어나 文重刊削
하고 或求之古字
하고 或徵諸方言
이라
加以孤陋寡儔와 愚昧多蔽하니 穿鑿之責을 於何可逃리오
以文字繁多라 故分舊十二卷三十二篇爲二十卷하고 又改孫卿新書爲荀卿子하니라
時歲在戊戌 大唐睿聖文武皇帝 元和十三年十二月也
注+盧文弨曰 傳習不絕은 俗間本에 作傳誓不絕하고 申抒는 宋本에 作申杼라 三十二篇四字는 元刻無라 又荀子 序作荀卿子하여 與諸書所引合이라하니라라
《荀子》의 서문
注+신臣 선겸先謙이 살펴보건대, 송宋 태주본台州本에는 ‘서序’ 위에 ‘주注’자가 있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도를 고찰하고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제도를 조정하여 예악禮樂 문물을 창제하고 인의仁義의 도리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 덕화德化와 형정刑政이 《시경詩經》 속에 남아 있는데,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도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지어졌다.
평왕平王이 동쪽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자, 제후들이 힘으로 정사를 하였고 오패五霸 이후에 이르러서는 성군의 도가 한 오라기의 실처럼 간들간들 위태로워졌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춘추春秋》를 지었으니, 그런 뒤에 느슨했던 삼대三代의 유풍이 다시 팽팽해졌으나 시대가 혼란하고 지위도 없어 공적이 천하에 널리 파급되지는 못하고 그저 문인들이 그 말씀을 전수할 뿐이었으며, 이처럼 쇠퇴해진 상태로 전국시대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가혹한 법과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권모술수로 인해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으로 논죄하고 사람을 죽여 시체가 온 성안에 널려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담론을 전개하는 자들이 또 신도愼到‧묵적墨翟‧소진蘇秦‧장의張儀를 으뜸으로 여기게 되니, 공자의 도가 거의 사라져 뜻있는 인물들이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이 때문에 맹가孟軻가 앞에서 도를 밝히고 순경荀卿이 그 뒤에서 도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고 사물의 이치를 지시할 때 나라를 다스리는 요지에 근간을 두었고, 옛날의 이상적인 법도를 서술하고 당대의 불합리한 현상을 지적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다스리는 법도를 일으켜 세우기를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한 것을 살펴보니, 참으로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선비이며 제왕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 글 또한 육경六經의 우익羽翼이 되고 공자의 가르침에 빛을 보태었으니, 그저 제자諸子의 설에 그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대체로 주공周公이 예악禮樂 문물을 창제하고 공자가 그것을 전승하고 순자荀子와 맹자孟子가 그것을 도와 완성하였기에 성왕聖王의 도가 공고해져 매우 깊어지고 완비되었으니, 이로 인해 비록 춘추春秋 때 사방 오랑캐가 번갈아 침범하고 전국戰國 때 삼강三綱의 인륜이 끊어졌음에도 유가儒家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말단 관직을 수행하는 여가에 옛 전적을 자주 보면서 내심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유풍이 우리 당唐나라에 충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순자荀子와 맹자孟子가 이 시대의 정사에 공이 있다고 여겨 더욱 좋아하고 흠모하였다.
그런데 《
맹자孟子》는
조씨趙氏의 《
장구章句》가 있고
注+신 선겸先謙이 살펴보건대, 태주본台州本에는 〈‘씨氏’가〉 ‘대代’로 되어 있다. 또한
박사博士를 두어 전수하고 학습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군자들이 그 글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순자荀子》는 주해注解가 없고 게다가 또 죽간竹簡을 엮었던 끈이 썩어 죽간竹簡이 떨어져나갔으며 서로 전하여 베끼는 과정에 오류가 생겨서, 비록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이따금 훑어보더라도 글 뜻이 통하지 않아 매번 책을 덮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대체로 논리가 잘 이해되면 마음에 흡족하고, 문장이 어긋나면 기분에 거슬리는 법이다.
순자荀子의 논리를 모르는 자는 이단異端이라 하여 그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는 자는 오탈자로 인해 끝까지 읽지 않고 그만두니, 이 때문에 순씨荀氏의 글이 천년이 되도록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나의 생각을 토로하여 문장의 의미를 다각도로 탐구하고, 고증할 적에는 여러 서적에서 널리 추심하였다.
다만, 옛날과 지금의 글자가 다르고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의 말이 달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증을 광범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편방偏傍이 서로 비슷하거나 성음聲音이 서로 통하는 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글자 수가 적어 더 보태거나 문구가 겹쳐 삭제하기 하고, 혹은 옛 글자에서 구하기도 하고, 혹은 방언方言에서 고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고루한 식견과 우매한 자질로 이 일을 수행하였으니, 견강부회하였다는 문책을 어디서 면할 수 있겠는가.
애당초 선현의 심오한 뜻을 조금도 밝혀내지는 못하고 그저 그 번잡한 상태만 추가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살펴보는 용도로 이용할 뿐 감히 후세에 전하지는 못하겠다.
글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 12권 32편으로 되어 있던 것을 나누어 20권으로 만들고, 또 《손경신서孫卿新書》란 이름을 《순경자荀卿子》로 바꾸었다.
편의 차례 또한 많이 바꿔 내용이 유사한 것끼리 서로 모이게 하였다.
이때는 무술년
대당大唐 예성문무황제睿聖文武皇帝(憲宗)
원화元和 13년(818) 12월이다.
注+노문초盧文弨가 말하기를 “전습부절傳習不絕이 세간의 통행본에는 ‘전서부절傳誓不絕’로 되어 있고, 신서申抒가 송본宋本에는 ‘신저申杼’로 되어 있다. 삼십이편三十二篇 네 자가 원각본元刻本에는 없다. 또 《순자荀子》가 서문에 《순경자荀卿子》로 되어 있어 여러 서적에 인용된 서명과 부합된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