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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集解(1)

순자집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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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序注+臣先謙案 宋台州本 序上有注字
昔周公稽古之道하고 損益夏殷之典하여 制禮作樂하고 以仁義天下
其德化刑政存乎詩하니
諸侯力政하고之後하여는 則王道不絕如綫이라
故仲尼定禮樂하고 作春秋하니 然後遺風 弛而復張이나 而無時無位하여 功烈不得被于天下하고 但門人傳述而已 陵夷至于戰國이라
於是申商苛虐 孫吳變詐 以族論罪하고 殺人盈城이라
談說者又以愼墨蘇張爲宗하니 則孔氏之道 幾乎息矣 有志之士 所爲痛心疾首也
故孟軻闡其前하고 荀卿振其後하니라
觀其立言指事 根極理要하고 敷陳往古하며 掎挈當世하여 撥亂興理 易於反掌하니 真名世之士 王者之師
又其書亦所以羽翼하고 增光孔氏하니 非徒諸子之言也
蓋周公制作之하고 仲尼祖述之하고 荀孟贊成之하여 所以膠固王道하여 至深至備하니 雖春秋之四夷交侵하고 戰國之弛絕이라도 斯道竟不墜矣
倞以末宦之暇 頗窺篇籍하여 竊感炎黃之風 未洽於聖代 謂荀孟有功於時政하여 尤所耽慕
而孟子有하고 注+臣先謙案 宋台州本作代亦嘗立博士하여 傳習不絕이라 故今之君子多好其書
獨荀子未有注解하고 亦復編簡爛脫하며 傳寫謬誤하여 雖好事者時亦覽之라도 至於文義不通하여 屢掩卷焉이라
夫理曉則愜心하고 文舛則忤意
未知者謂異端不覽하고 覽者以脫誤不終하니 所以荀氏之書千載而未光焉이라
輒用申抒鄙思하여 敷尋義理하고 其所徵據 則博求諸書하니라
但以古今字殊하고 齊楚言異하여 事資參考 不得不廣일새
或取相近이어나 聲類相通하고 或字少增加어나 文重刊削하고 或求之古字하고 或徵諸方言이라
加以孤陋寡儔 愚昧多蔽하니 穿鑿之責 於何可逃리오
曾未足粗明先賢之旨하고 適增其蕪穢耳
蓋以自備省覽이요 非敢傳之將來
以文字繁多 故分舊十二卷三十二篇爲二十卷하고 又改孫卿新書爲荀卿子하니라
其篇第亦頗有移易하여 使以類相從云이라
時歲在戊戌 大唐睿聖文武皇帝 元和十三年十二月也注+盧文弨曰 傳習不絕 俗間本 作傳誓不絕하고 申抒는 宋本 作申杼 三十二篇四字 元刻無 又荀子 序作荀卿子하여 與諸書所引合이라하니라


《荀子》의 서문注+ 선겸先謙이 살펴보건대, 태주본台州本에는 ‘’ 위에 ‘’자가 있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도를 고찰하고 나라와 나라의 제도를 조정하여 예악禮樂 문물을 창제하고 인의仁義의 도리로 천하를 다스렸다.
덕화德化형정刑政이 《시경詩經》 속에 남아 있는데, 유왕幽王여왕厲王이 도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변풍變風변아變雅가 지어졌다.
평왕平王이 동쪽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자, 제후들이 힘으로 정사를 하였고 오패五霸 이후에 이르러서는 성군의 도가 한 오라기의 실처럼 간들간들 위태로워졌다.
이 때문에 공자께서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춘추春秋》를 지었으니, 그런 뒤에 느슨했던 삼대三代의 유풍이 다시 팽팽해졌으나 시대가 혼란하고 지위도 없어 공적이 천하에 널리 파급되지는 못하고 그저 문인들이 그 말씀을 전수할 뿐이었으며, 이처럼 쇠퇴해진 상태로 전국시대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불해申不害상앙商鞅의 가혹한 법과 손무孫武오기吳起의 권모술수로 인해 삼족三族을 멸하는 것으로 논죄하고 사람을 죽여 시체가 온 성안에 널려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담론을 전개하는 자들이 또 신도愼到묵적墨翟소진蘇秦장의張儀를 으뜸으로 여기게 되니, 공자의 도가 거의 사라져 뜻있는 인물들이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이 때문에 맹가孟軻가 앞에서 도를 밝히고 순경荀卿이 그 뒤에서 도를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하고 사물의 이치를 지시할 때 나라를 다스리는 요지에 근간을 두었고, 옛날의 이상적인 법도를 서술하고 당대의 불합리한 현상을 지적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다스리는 법도를 일으켜 세우기를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한 것을 살펴보니, 참으로 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선비이며 제왕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 글 또한 육경六經우익羽翼이 되고 공자의 가르침에 빛을 보태었으니, 그저 제자諸子의 설에 그치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대체로 주공周公예악禮樂 문물을 창제하고 공자가 그것을 전승하고 순자荀子맹자孟子가 그것을 도와 완성하였기에 성왕聖王의 도가 공고해져 매우 깊어지고 완비되었으니, 이로 인해 비록 춘추春秋 때 사방 오랑캐가 번갈아 침범하고 전국戰國삼강三綱의 인륜이 끊어졌음에도 유가儒家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말단 관직을 수행하는 여가에 옛 전적을 자주 보면서 내심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의 유풍이 우리 나라에 충분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순자荀子맹자孟子가 이 시대의 정사에 공이 있다고 여겨 더욱 좋아하고 흠모하였다.
그런데 《맹자孟子》는 조씨趙氏의 《장구章句》가 있고 注+선겸先謙이 살펴보건대, 태주본台州本에는 〈‘’가〉 ‘’로 되어 있다. 또한 박사博士를 두어 전수하고 학습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군자들이 그 글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순자荀子》는 주해注解가 없고 게다가 또 죽간竹簡을 엮었던 끈이 썩어 죽간竹簡이 떨어져나갔으며 서로 전하여 베끼는 과정에 오류가 생겨서, 비록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이따금 훑어보더라도 글 뜻이 통하지 않아 매번 책을 덮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대체로 논리가 잘 이해되면 마음에 흡족하고, 문장이 어긋나면 기분에 거슬리는 법이다.
순자荀子의 논리를 모르는 자는 이단異端이라 하여 그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는 자는 오탈자로 인해 끝까지 읽지 않고 그만두니, 이 때문에 순씨荀氏의 글이 천년이 되도록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나의 생각을 토로하여 문장의 의미를 다각도로 탐구하고, 고증할 적에는 여러 서적에서 널리 추심하였다.
다만, 옛날과 지금의 글자가 다르고 나라와 나라의 말이 달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증을 광범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편방偏傍이 서로 비슷하거나 성음聲音이 서로 통하는 것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글자 수가 적어 더 보태거나 문구가 겹쳐 삭제하기 하고, 혹은 옛 글자에서 구하기도 하고, 혹은 방언方言에서 고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고루한 식견과 우매한 자질로 이 일을 수행하였으니, 견강부회하였다는 문책을 어디서 면할 수 있겠는가.
애당초 선현의 심오한 뜻을 조금도 밝혀내지는 못하고 그저 그 번잡한 상태만 추가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살펴보는 용도로 이용할 뿐 감히 후세에 전하지는 못하겠다.
글의 분량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 12권 32편으로 되어 있던 것을 나누어 20권으로 만들고, 또 《손경신서孫卿新書》란 이름을 《순경자荀卿子》로 바꾸었다.
편의 차례 또한 많이 바꿔 내용이 유사한 것끼리 서로 모이게 하였다.
이때는 무술년 대당大唐 예성문무황제睿聖文武皇帝(憲宗) 원화元和 13년(818) 12월이다.注+노문초盧文弨가 말하기를 “전습부절傳習不絕이 세간의 통행본에는 ‘전서부절傳誓不絕’로 되어 있고, 신서申抒송본宋本에는 ‘신저申杼’로 되어 있다. 삼십이편三十二篇 네 자가 원각본元刻本에는 없다. 또 《순자荀子》가 서문에 《순경자荀卿子》로 되어 있어 여러 서적에 인용된 서명과 부합된다.”라 하였다.


역주
역주1 三五 : 상고시대의 제왕인 三皇五帝를 가리킨다.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三皇은 伏羲‧神農‧黃帝이고, 五帝는 少昊‧顓頊‧高辛‧唐堯‧虞舜이라 한다.
역주2 : 이 글을 쓴 楊倞이 唐나라 사람이므로 唐 高宗의 이름자인 ‘治’를 피해 바꿔 쓴 것이다. 아래 ‘理要’와 ‘興理’의 경우도 같다.
역주3 至於幽厲失道 始變風變雅作矣 : 幽王(?~B.C. 771)은 周나라 제12대 왕으로 褒姒를 총애하여 국사를 망치고 申侯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厲王은 周나라 제10대 왕으로 폭정과 사치로 일관하면서 비방하는 자를 죽이다가 나라사람들에 의해 축출되어 彘 지방으로 도망갔다.
變風은 ‘正風’의 대칭으로 〈國風〉 중에서 〈邶風〉부터 〈豳風〉까지의 135편을 말하고, 變雅은 ‘正雅’의 대칭으로 〈小雅〉 중에서 〈六月〉부터 〈何草不黃〉까지의 58편과 ‘大雅’ 중에서 〈民勞〉부터 〈召旻〉까지 13편의 총칭이다. 이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周 왕조의 쇠퇴기에 속한다. 〈周南 關雎〉의 序에 “聖王의 도가 쇠퇴해짐에 이르러 禮義가 폐해지고 정치교화가 베풀어지지 못해 제후국은 나라마다 정사가 다르고 민간에는 집집마다 풍속이 달라져서 變風과 變雅가 지어졌다.[至於王道衰 禮義廢 政教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 하였다.
역주4 平王東遷 : 平王은 幽王의 태자 宜臼이다. 幽王이 宜臼의 생모인 申后와 宜臼를 폐하고 그 대신 총애하는 褒姒와 褒姒의 아들 伯服으로 바꾸자, 申后의 아버지 申侯가 繒나라 및 犬戎과 함께 周나라를 공격하여 幽王을 죽임으로써 西周가 멸망하였다. 그 뒤에 宜臼가 申侯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犬戎을 물리칠 힘이 없어 동방 제후들의 지지 아래 B.C. 770년에 洛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역사에서 이것을 東周라고 부른다. 그 뒤로 왕실의 역량이 약해져서 제후를 제어하지 못해 동란과 변혁의 春秋時代로 진입하였다.
역주5 五霸 : 춘추 때 제후의 우두머리였던 齊 桓公, 晉 文公, 秦 穆公, 宋 襄公, 楚 莊王 등을 가리킨다.
역주6 三代 : 왕도정치를 행했던 夏‧商‧周 세 朝代의 합칭이다.
역주7 六經 : 여섯 가지의 儒家 경전으로, 《詩經》, 《書經》, 《禮記》, 《樂經》, 《易經》, 《春秋》를 가리킨다.
역주8 三綱 :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에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인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으로, 儒家 도덕의 기본이다.
역주9 趙氏章句 : 東漢 趙岐(?108~201)의 저술인 《孟子章句》를 말한다. 趙岐는 京兆 長陵 사람으로 자는 邠卿이다. 桓帝 때 京兆尹을 지냈다. 환관 唐衡을 논박한 일로 인해 가족과 친족이 모두 살해되었다. 唐衡이 죽은 뒤에 幷州刺史가 되었고, 靈帝 때 黨錮를 만나 10여 년 동안 폐기되었다가 獻帝 때 다시 등용되었다.
역주10 偏傍 : 漢字의 왼쪽과 오른쪽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邊旁이라고도 한다.

순자집해(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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