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8 正名而
하고 而喩
하며 辨異而不過
하고 推類而不悖
라
聽則合文
하고 辨則盡故
라 以正道而辨姦
은 猶引繩以持曲直
이라 是故邪說不能亂
하고 無所
이라
注
正名而期는 謂正其名以會物하여 使人不惑也라 質은 物之形質이라
質請而喩는 謂若形質自請其名然하여 因而喩하여 知其實也라
辨異而不過는 謂足以別異物則已하여 不過說也라 推類而不悖는 謂推同類之物하여 使共其名하여 不使乖悖也라
聽則合文과 辨則盡故는 謂聽它人之說則取其合文理者하고 自辨說則盡其事實也라
正道는 謂正名之道라 持는 制也라 竄은 匿也라 百家無所隱竄은 言皆知其姦詐也라
○王念孫曰 楊說質請
은 甚迂
라 質
은 本也
注+繫辭傳에 原始要終하여 以爲質也와 曲禮에 禮之質也의 鄭虞注竝曰 質은 本也라하니라라 請
은 讀爲情
이라
情은 實也라 言本其實而曉喩之也니 上文云 名聞而實喩 是其證也라
正名而期
하고 質情而喩
라한대 情卽是實
이니 實與名正相對也
라 古者情請同聲而通用
注+成相篇에 明其請의 楊注에 請은 當爲情이라하니라 禮論篇에 情文俱盡이 史記禮書에 情作請하여늘 徐廣曰 古情字或假借作請하니 諸子中多有此比라하니라 列子說符篇의 發於此而應於外者唯請에 張湛曰 請은 當作情이라하고 又墨子尙同明鬼非命諸篇에 皆以請爲情이라이라
명칭을 바로 세워 사람들이 약정할 수 있게 하고 실제 사물에 근본을 두어 사람들을 이해시키며, 서로 다른 사물을 변별하여 실수가 없도록 하고 같은 종류의 사물을 미루어서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는 조리에 맞는 〈것만을 취하고〉 자기가 논변할 때는 그렇게 된 까닭을 남김없이 〈밝혀야 한다.〉 정당한 도리로 간사함을 변별하는 것은 마치 목수가 먹줄을 끌어당겨 굽고 곧음을 가늠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간사한 학설이 명칭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百家의 기괴한 설이 숨을 데가 없는 것이다.
注
楊倞注:‘正名而期’는 그 명칭을 바르게 세워 사물을 취합해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이른다. 質은 사물의 形質이다.
‘質請而喩’는 形質이 스스로 자기 명칭을 요청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로 인해 깨우쳐 그 실제 사물을 아는 것을 이른다.
‘辨異而不過’는 충분히 동일하지 않은 사물을 변별할 수 있으면 그 정도로 끝내어 말을 실수하지 않는 것을 이른다. ‘推類而不悖’는 같은 종류의 사물을 미루어 그 명칭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이른다.
‘聽則合文’과 ‘辨則盡故’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는 조리에 맞는 것만을 취하고 자기가 설명할 때는 사실을 남김없이 〈밝히는〉 것을 이른다.
‘正道’는 명칭을 바로 세우는 도리를 이른다. 持는 제어한다는 뜻이다. ‘竄’은 숨는다는 뜻이다. ‘여러 학파의 〈그릇된 주장이〉 숨을 데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간사하다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다.
○
王念孫:
楊氏의
質請에 관한 설명은 매우 터무니없다.
質은 ‘
本’의 뜻이다.
注+≪周易≫ 〈繫辭傳〉에 “原始要終 以爲質也(사물의 시작과 종결을 고찰하고 탐구하여 자기의 본질로 삼는다.)”라 한 곳과, ≪禮記≫ 〈曲禮〉에 “禮之質也(禮의 본질이다.)”라 한 곳의 鄭玄과 虞翻의 주에 모두 “質은 ‘本’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請은 ‘
情’으로 읽어야 한다.
情은 ‘實’의 뜻이다. 그 실제 사물에 근간을 두어 이해시키는 것을 말하니, 윗글(22-77)에 “名聞而實喩(명칭을 들으면 실제 사물이 이해된다.)”라고 한 것이 곧 그 증거이다.
“
正名而期 質情而喩”라고 하였는데, 이
情은 곧 실제 사물이니 실제 사물과 명칭이 정확히 서로 짝이 된다. 옛날에 ‘
情’과 ‘
請’은 음이 같아 통용하였다.
注+〈成相篇〉에 “明其請(그 실정을 잘 아는 데에 있다.)”이라 한 곳의 楊氏 주에 “請은 마땅히 ‘情’으로 되어야 한다.”라 하였다. 또 〈禮論篇〉에 “情文俱盡(감정과 예법이 모두 완전하다.)”이라 한 〈‘情’이〉 ≪史記≫ 〈禮書〉에 情이 ‘請’으로 되어 있는데, 徐廣이 “옛날에 ‘情’자는 간혹 假借하여 ‘請’으로 되어 있기도 하니, 諸子 속에는 이와 같은 사례가 많이 있다.”라고 하였다. ≪列子≫ 〈說符篇〉의 “發於此而應於外者唯請(내 마음속에서 나왔을 때 외부의 반응은 상대 마음에 느끼는 그대로 나타난다.)”이라 한 곳에 張湛이 “請은 마땅히 ‘情’으로 되어야 한다.”라 하고, 또 ≪墨子≫의 〈尙同〉‧〈明鬼〉‧〈非命〉 등 여러 편에 모두 ‘請’을 ‘情’의 뜻으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