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 王念孫曰 經은 讀爲徑이니 即下文所謂蹊徑이라
修身篇云 治氣養心之術
은 莫徑由禮
하고注+此徑字는 訓爲疾이니 莫徑은 即本篇所謂莫速也라 漢書張騫傳 從蜀宜徑에 如淳曰 徑은 疾也라하니라 見라 莫要得師
하고 莫神一好
라하니 語意略與此同
이라
學之經
은 即學之徑
이니 古讀徑如經
이라 故與經通
이라注+賈子立後義篇에 其道莫經於此라하니 莫經은 即荀子之莫徑이라
郭嵩燾曰 近其人은 謂得其人而師之요 好其人이면 則是中心悅而誠服하여 親炙之深者也라
引修身篇之莫徑하여 謂即本篇所謂莫速이라하니 是學之速莫速乎好其人이라 於詞爲複이라
上文學莫便乎近其人이라하여 亦無此複語하니 其說非也라
呂覽當染有始知分驕恣諸篇에 高注竝云 經은 道也라하니 學之經은 猶言學之道耳라
成相篇云 治之經
은 禮與刑
이라하고 又云 聽之經
은 明其
이라하니 治之經
과 聽之經
은 猶言治之道
와 聽之道
라
그러므로 “배우는 도는 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배우는 도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이 없고 예의禮義를 존중하는 일이 그 차선책이 된다.
注
양경주楊倞注 : 배우는 큰 도는 훌륭한 사람을 가까이하길 좋아하는 것보다 빠른 것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면 예의禮義를 존중하는 일이 그 차선책이 된다.
○ 왕염손王念孫 : ‘경經’은 ‘경徑’으로 읽어야 하니, 곧 아래 글의 이른바 ‘혜경蹊徑’이다.
배우는 길로 들어가는 지름길[蹊徑]은 훌륭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빠른 것이 없고 예의禮義를 존중하는 일이 그 차선책임을 말한 것이다.
〈
수신편修身篇〉에 “기질을 다스리고 마음을 기르는 법은
예의禮義를 따르는 것보다 빠른 지름길이 없고[治氣養心之術 莫徑由禮],
注+이 ‘경徑’자는 빠르다는 뜻이니, ‘막경莫徑’은 곧 본편의 이른바 ‘막속莫速’과 같다.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에 “종촉의경從蜀宜徑(蜀郡을 통해 가는 것이 당연히 빠를 것이다.)”이라고 한 곳에서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경徑’은 빠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순如淳이 한 말은〉 《사기史記》 〈대완전大宛傳〉의 《집해集解》에 보인다. 스승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고, 일편단심으로 선행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신묘한 것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의미가 대체로 이곳과 같다.
‘
학지경學之經’은 곧 ‘
학지경學之徑’이니 옛날에 ‘
경徑’자를 ‘
경經’자처럼 읽었기 때문에 ‘
경經’과 통용되었다.
注+《가자賈子》 〈입후의편立後義篇〉에 “기도막경어차其道莫經於此(그 길은 이것보다 빠른 지름길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막경莫經’은 곧 《순자荀子》의 ‘막경莫徑’과 같다.
그런데 양경楊倞은 ‘배우는 큰 도’라고 하였으니, 잘못되었다.
곽숭도郭嵩燾 : 그 사람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얻어 그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을 말하고, 그 사람을 좋아하면 곧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진심으로 승복하여 스승에게 직접 배우기를 깊이 하게 되는 것이다.
예의禮義를 존중한다는 것은 스스로 예법을 가지고 자기 몸을 단속하는 것을 말한다.
선겸안先謙案 : 왕씨王氏는 ‘경經’을 ‘경徑’으로 간주해 읽었다.
그리하여 〈수신편修身篇〉의 ‘막경莫徑’을 인용하여 “이는 곧 본편의 이른바 ‘막속莫速’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은 ‘배우는 길이 빠르기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라는 말이 되므로 문구가 중복이 된다.
위 글에 ‘배우는 도는 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라고 하여 그 문구 또한 이처럼 중복되는 말이 없으니, 그 설은 틀린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당염當染〉‧〈유시有始〉‧〈지분知分〉‧〈교자驕恣〉 등 여러 편에서 고유高誘의 주는 모두 “‘경經’은 ‘도道’이다.”라고 하였으니, ‘학지경學之經’은 ‘학지도學之道’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성상편成相篇〉에 “치지경治之經 예여형禮與刑(다스리는 도는 예법과 형벌이다.)”이라 하고, 또 “청지경聽之經 명기청明其請(정사를 처리하는 도는 그 실정을 잘 아는 데에 있다.)”이라고 하였으니, ‘치지경治之經’과 ‘청지경聽之經’은 ‘치지도治之道’와 ‘청지도聽之道’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이곳의 ‘학지경學之經’과 동일한 사례이니, 《순자荀子》의 글은 나름대로 이런 문법체계를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