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王念孫曰 此本作無用而辯
하고 不急而察
이라 辯者
는 智也慧也
注+廣雅에 辯은 慧也라하니 慧는 通作惠라 晉語曰 巧文辯惠則賢이라하고 逸周書寶典篇曰 辯惠于智라하고 商子說民篇曰 辯慧는 亂之贊也라하니 辯通作辨이라 大戴記文王官人篇曰 不學而性辯이라하고 荀子性惡篇曰 性質美而心辯知라하고 東周策曰 兩周辯知之士라하니 是辯與智慧同義라요 非辯論之辯
이라 下文言辯而逆
이 乃及言論耳
라
無用而辯
은 卽辯而無用
이요 非謂言無用而辯也
注+今本言字涉下文言辯而衍이라며 不急而察
은 卽察而不急
이요 非謂辯不惠而察也
注+今本辯字涉上句而衍이라라
上文云甚察而不急
注+今本急字亦誤作惠라 辯은 見前甚察而不惠下라하고 辯而無用
이라하니 是其明證矣
라 楊說皆失之
라
말이 지혜롭고 요긴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하는 것은
注
양경주楊倞注:혜惠는 ‘순順(순하다)’의 뜻이다. 논변이 도리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
왕염손王念孫:여기는 본디 ‘
무용이변 불급이찰無用而辯 不急而察’로 되어 있다.
변辯이란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뜻이고
注+≪광아廣雅≫에 “변辯은 ‘혜慧(슬기롭다)’의 뜻이다.”라 하였으니, 혜慧는 ‘혜惠’로 통용해 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교문변혜즉현巧文辯惠則賢(문장이 정교하고 말이 지혜로우면 훌륭하다.)”이라 하고, ≪일주서逸周書≫ 〈보전편寶典篇〉에 “변혜우지辯惠于智(지혜로워 말이 재치가 있다.)”라 하고, ≪상자商子≫ 〈설민편說民篇〉에 “변혜 난지찬야辯慧 亂之贊也(말이 재치가 있는 것은 혼란을 돕는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 경우의 변辯은 ‘변辨’과 통용해 쓴다. 그리고 ≪대대례기大戴禮記≫ 〈문왕관인편文王官人篇〉에 “불학이성변不學而性辯(배우지 않았으나 자질은 지혜롭다.)”이라 하고, ≪순자荀子≫ 〈성악편性惡篇〉에 “성질미이심변지性質美而心辯知(자질이 뛰어나고 마음이 지혜롭다.)”라 하고, ≪전국책戰國策≫ 〈동주책東周策〉에 “양주변지지사兩周辯知之士(동주東周와 서주西周의 지혜로운 인물)”라 하였는데, 이 경우의 변辯은 ‘지혜智慧’와 같은 뜻이다. 변론辯論의 ‘
변辯’은 아니다. 아래 글(6-62)의 “
언변이역言辯而逆(말을 잘하면서도 이치를 거스른다.)”이라는 문구가 비로소 언어의 뜻으로 썼을 뿐이다.
‘
무용이변無用而辯’은 곧 총명하지만 쓸모가 없다는 것이지 ‘하는 말이 쓸모가 없는데도 말은 잘하는 것[
언무용이변言無用而辯]’을 이른 것이 아니며,
注+지금 통행본의 ‘언言’자는 아래 글 ‘언변言辯’과 연관되어 잘못 덧붙여진 것이다. ‘
불급이찰不急而察’은 곧 말이 분명하지만 실제에는 요긴하지 않다는 것이지 ‘말이 순리롭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것[
변불혜이찰辯不惠而察]’을 이른 것은 아니다.
注+지금 통행본의 ‘변辯’자는 위 문구와 연관되어 잘못 덧붙여진 것이다.
윗글(6-24, 25)에 “
심찰이불급 변이무용甚察而不急 辯而無用(매우 분명하지만 요긴하지 않고
注+지금 통행본의 ‘급急’자 또한 ‘혜惠’자로 잘못되었다. 변辯은 그 설명이 앞서(6-24) “심찰이불혜甚察而不惠(매우 분명하지만 요긴하지 않다.)” 아래에 보인다. 지혜롭지만 쓸모가 없다.)”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이다.
양씨楊氏의 설은 모두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