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公孫子
는 齊相也
니 未知其名
이라 에 孟嘗君客有公孫成
하니 豈後爲齊相乎
아 或曰 公孫名忌
라하니라
子發은 楚令尹이니 未知其姓이라 戰國策에 莊辛諫楚襄王曰 蔡聖侯南遊乎高陂하고 北陵乎巫山하며
左枕幼妾
하고 右擁嬖女
하여 馳騁乎高蔡之閒而不以國家爲事
하여 不知夫子發方受命于宣王
하여 繫
以朱絲而見之
라하니라
史記에 蔡侯齊爲楚惠王所滅이라하여늘 莊辛云宣王하니 與史記不同이라
○盧文弨曰 案楚策
에 左枕作左抱
라 蔡無聖侯
하니 謂當作靈侯
라 或者古通稱歟
아
鮑彪云 昭十一年에 楚子誘蔡侯般하여 殺之於申이라하고 經傳不書子發하니 蓋使子發召之라
楚子는 靈王이라 若宣王인댄 蔡滅八十年矣라 淮南道應訓에 子發伐蔡하여 踰之하니 宣王郊迎이라하고
라하니라 今案 鮑吳之說
은 以爲楚靈王
이라 然誘之與伐
은 其事不同
하니 闕疑可也
라
王念孫曰 蔡在楚北하고 非在楚西하니 不得言西伐蔡라 將은 子匠反이라 西는 當爲而라 言子發將兵而伐蔡也라
공손자公孫子가 말하였다. “〈초楚나라의〉 자발子發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채蔡나라를 공격하여 채蔡나라를 점령하고 채후蔡侯를 포로로 잡았다.
注
양경주楊倞注:공손자公孫子는 제齊나라 재상이니,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후어後語≫에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 중에 공손성公孫成이 있으니, 혹시 나중에 제齊나라 재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공손公孫의 이름은 기忌이다.”라고 하였다.
자발子發은 초楚나라 영윤令尹이니, 그 성은 알 수 없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장신莊辛이 초楚 양왕襄王에게 간하기를 ‘채蔡 성후聖侯가 남쪽으로는 고피高陂를 유람하고 북쪽으로는 무산巫山을 올라갔으며,
왼편에는 나이 어린 첩을 끼고 오른편에는 총애하는 여인을 껴안고서 이들과 함께 고채高蔡 등지에서 말을 달리고 국가의 정사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장차 저 자발子發이 곧 초楚 선왕宣王의 명령을 받아 붉은 밧줄로 자기를 결박하여 그의 왕에게 바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라 했다.”라고 하였다.
≪사기史記≫ 〈관채세가管蔡世家〉에 의하면 채후蔡侯 제齊가 초楚 혜왕惠王에게 멸망되었다고 하였는데, 장신莊辛은 ‘선왕宣王’이라고 하였으니, ≪사기史記≫의 내용과는 같지 않다.
○노문초盧文弨:살펴보건대,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좌침左枕’은 ‘좌포左抱’로 되어 있다. 채蔡나라에는 성후聖侯가 없으니, 오사도吳師道는 “마땅히 ‘영후靈侯’로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혹시 옛날에 이 둘을 통칭했는지 모르겠다.
포표鮑彪가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소공昭公 11년에 ‘초자楚子가 채후蔡侯 반般을 유인하여 신申 땅에서 죽였다.’고 하고, 경전經傳에는 자발子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자발子發을 보내 그를 불렀을 것이다.
초자楚子는 영왕靈王이다. 선왕宣王이라 한다면 〈맞지 않으니 그가 살았던 시기는〉 채蔡나라가 멸망한 지 80년 이후이다. ≪회남자淮南子≫ 〈도응훈道應訓〉에 ‘자발벌채子發伐蔡 유지踰之 선왕교영宣王郊迎(자발子發이 채蔡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돌아오니, 선왕宣王이 직접 교외로 나가 그를 영접하였다.)’이라 하고,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閒訓〉에 또 ‘위왕威王에게 죄를 얻었다.’고 한 것은 모두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포씨鮑氏와 오씨吳氏의 설은 〈선왕宣王은〉 초楚 영왕靈王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인하였다는 것과 공격하였다는 것은 그 일이 같지 않으니, 의문스러운 것을 당분간 보류하여 두는 것이 좋겠다.
왕염손王念孫:채蔡나라는 초楚나라 북쪽에 있고 초楚나라 서쪽에 있지 않으니, ‘서쪽으로 가 초楚나라를 공격하였다.[서벌채西伐蔡]’라고 말할 수 없다. 장將은 〈그 음이〉 자子와 장匠의 반절이다. ‘서西’는 마땅히 ‘이而’로 되어야 한다. 자발子發이 군대를 거느리고 채蔡나라를 공격한 것을 말한다.